텃밭일지 35
텃밭을 가꾸면서 씨를 뿌린 것은 열무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씨가 아닌 모종을 심었다. 열무는 어느 곳에서도 모종을 팔지 않아 할 수 없이 파종을 했다. 어느 블로거의 글에 의하면 열무는 워낙 발아율이 높아서 모종을 팔지 않는 것으로 추측한다는데 역시 열무는 잘 자라긴 했다. 하지만 씨를 뿌리고 솎아내기 해야 하는 과정이 번거롭기도 하지만 자신도 없어서 다른 작물엔 도전하지 못했다.
어떤 식물이든 모종 상태일 때의 크기는 다 거기서 거기다. 가운데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를 가진 모종을 땅에 심으면 녀석들은 안 자라는 것 같아도 서서히 키가 오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쑥쑥 커나갔다. 내가 가지를 심어둔 걸 본 지인이, 가운데 것은 뽑아서 옮겨야 한다고 말해준 이유를 나중에야 실감했다. 작은 가지 모종하나가 내 허리높이를 넘겨 자랄 줄 상상도 못 했다.
고추도, 깻잎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놀랐던 건 옥수수다. 정말이지 옥수수는 모종 상태의 크기를 생각하면 드라마틱하게 자라는 녀석이었다. 가지나 고추, 깻잎처럼 가지를 늘여가며 자라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키로 승부를 보겠다는 듯 쑥쑥 커나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태풍이 오면 다 자빠지는 것 아닐까 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면 옥수수는 땅에 자잘한 방사형 그물 같은 뿌리를 박고 서 있는데 아마도 그것들이 키 큰 옥수수를 지탱하는 것 아닐까 추측했다.
이런 옥수수를 텃밭에 심을까 말까 고민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그 키 때문이었다. 옆 밭에서 해를 가린다고 싫어하지 않을까. 제일 입구 쪽 밭인데 난데없이 키 큰 옥수수가 서 있으면 좀 생뚱맞아 보이는 건 아닐까. 내 텃밭에 옥수수 하나를 심을까 말까 고민하며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이런 고민에 불을 댕긴 것은 인터넷을 뒤지다 만난 어떤 텃밭 지기의 글이었는데, 일부 텃밭에선 너무 키 큰 작물인 옥수수가 금지작물이라는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나자 고민은 더 커졌다. 하지만 둘러보면 한두 집은 옥수수를 심기도 했고, 옥수수 못지않은 키를 자랑하는 늙은 오이 넝쿨을 올린 집도 있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며 소심하게 여섯 개를 제일 테두리에 심었다. 최대한 옆 밭에 그늘지지 않을 만한 위치였다.
옥수수는 참으로 잘 자랐다. 비록 내 키가 단신이긴 하지만 양팔을 올려야 끝에 닿을 만큼 훌쩍 커졌다. 가지 끝에 옥수수 열매가 달리고, 수염도 나기 시작했는데 친구는 그 수염이 시들면 그때가 바로 옥수수를 수확하는 시기라고 말해주었다.
친구의 오빠는 시골집에서 취미 삼아 이것저것 키우는데 거두면 주변에 나눠주는 재미에 농사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덕분에 작년에도, 올해도 친구 오빠의 옥수수를 얻어먹었다. 그 어떤 양념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물만으로 삶아도 달고 맛있는 옥수수였다. 심지어 옥수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올해 텃밭에 옥수수를 심어볼까 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 작년에 맛본 친구 오빠의 옥수수 덕이기도 했다.
막상 나는 조금 늦게 심어 아직 수확하지 않았으나 친구가 가져다준 옥수수를 삶아 먹으며 내 텃밭의 옥수수 맛을 상상했다. 어떨까. 잘 여물기나 할까. 사실 옥수수는 껍질로 덮여 있으니 까보지 않은 다음에야 알이 실한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텃밭에 물을 주고 옥수수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제법 뚱뚱해지고, 수염도 시들기 시작했다. 주말쯤엔 한번 따볼까 싶은 마음에 자세히 봤는데 옥수수는 한가지 끝에 한 개씩의 옥수수만 달렸다. 그러니 저리 크게 자라도 한 그루에서 딸 수 있는 옥수수는 몇 개 되지 않는 셈이다. 자리 차지는 꽤 하는데, 다닥다닥 열리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생각해도 가성비가 떨어지는 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그램에 옥수수 사진을 올렸다. 가성비 떨어진다는 생각은 들지만 푸르게 쑥쑥 큰 나의 옥수수. 수확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올린 그 사진을 보고 지인이 궁금했다며 물었다. 옥수수는 한 그루에 하나의 열매만 맺는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냐고.
나도 처음이지만 옥수수를 키워본 사람으로서 열린 것을 보니 가지 하나에 달랑 하나만 열리는, 매우 가성비 떨어지는 작물이라고 답글을 달았더니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옥수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아쉽지만, 대신 가지 하나에 하나씩 아주 옹골차게 키워내는 거로구나”
아…. 그렇다. 같은 옥수수를 놓고도 어떻게 바라보는가, 어디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이렇게나 달라질 수도 있는 거였다. 가성비 떨어진다고 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결국 옥수수는 그렇게 옹골차게 열매를 키워내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키만 컸지 수확할 것은 몇 개 안 되지만 주말엔 옥수수를 따야겠다 싶어 텃밭에 나가 물을 주고 한번 옥수수를 바라봤다. 옥수수는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푸르고, 늠름했는데 지인이 했던 말을 오래 생각했다.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삶은 그렇게 달라질 것이다. 저마다의 다름도 그럴 것이다. 당연하면서도 잠시 잊었다. 살다 보면 또 잊고 나의 시각만이 옳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텃밭의 옥수수가 없는 계절에도 나는 종종 그들이 생각날 것 같다. 가성비 떨어지는 옥수수, 그러나 옹골차게 자라는 옥수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