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 여행 6일 차. 늘 바쁜 여행자였던 나는 새벽에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들어오는 일정을 사나흘쯤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여행지에서 닷새 이후의 모습은 나에게 낯선 일이다. 7박 8일의 여행을 누리는 동안 이런 여유, 느긋함이 참 좋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오늘 못 간 곳은 내일 가보면 되고, 내일 어디를 갈지는 미리 세세하게 계획할 필요 없이 오늘쯤 궁리하는 나날이었다. 그간 나의 여행이 관광이었다면 이 여행은 휴가라는 말에 걸맞다.
휴가 6일째 여정은 남부 투어였다. 사람들은 괌에서 다양한 액티비티를 한다. 주로 가족여행으로 오는 이들이 많으므로 대부분의 액티비티는 물과 관련되어 있다. 돌핀 크루즈, 스노클링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우린 그런 액티비티를 거의 하지 않고 미리 두 개만 신청하고 괌에 왔다. 정글 투어와 남부 투어였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남부 투어를 예약한 날이었다. 말 그대로 괌섬의 남부까지 내려갔다 온다. 우리나라의 거제도 크기라고 하니 남부까지 내려갔다 온다고 해서 엄청 먼 거리를 다녀오는 건 아니다.
물색이 신비로운 에메랄드 밸리, 마젤란이 처음 괌섬에 발을 디딘 마을이라는 메리조 부두, 그리고 바람이 거센 세티 베이 전망대와 솔레라드 요새. 파도가 없이 바닷물이 가둬진 듯한 느낌의 이나라한 자연 풀장. 마지막으로는 괌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사람이 떠올리는 사랑의 절벽. 이렇게 여섯 곳을 들리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투어엔 세팀이 참여했다. 이십 대 커플, 십 대 자매를 둔 4인 가족. 그리고 중년의 우리 부부. 그러고 보니 연령대도, 구성도 다양했다.
몇 해 전 미국을 여행할 때 현지 투어를 하며 만났던 가이드를 가끔 생각한다. 그는 사진 찍는 것을 즐기지 않으므로 그저 풍경을 보겠다는 말을 무시한 채 매 장소마다 끊임없이 포즈를 요구했다.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된다고, 찍고 싶지 않다고 하는 말에는 오히려 까다롭고 피곤하게 구는 사람이라는 듯 반응했다. 그리고 모든 말끝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원래 이런 일 하는 사람 아니라고, 한국에 사업체도 있고, 이 일은 그저 사람 만나는 재미에 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사람 만나는 재미로 가이드 일을 한다는 그의 말을 다 믿지도, 다 안 믿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일방통행과도 같은 가이드였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날의 경험 이후 현지 투어를 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풍경을 보고 즐기는 것이 여행이지만 사람으로 인해 더 즐겁고 사람으로 인해 더 힘들어지기도 하는 것이 여행이니까. 그런 것이 또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번 괌의 가이드는 걱정과는 달리 유쾌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우리와 동년배의 그는 결혼하며 괌으로 와서 여태껏 자리 잡고 사는 이였는데 긍정적이며 밝은 사람이었다. 가족경영으로 가이드업체를 운영하는지라 중간 코스에서 종종 그의 가족들을 마주쳤다. 아내도, 딸도, 사위도 각자 팀을 이끌고 가이드 중이었다. 가족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매번 반갑게 인사했다. 특히 아내를 만날 때마다 매번 처음 만나는 것처럼 소리높여 아내를 불렀다. “여보!”
가이드라는 직업적인 느낌보다는 친근한 동네 사람 분위기여서 일행 모두 많이 웃었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차 안에서는 그의 연애와 결혼 스토리를 들으며 다들 투어보다 그의 이야기를 더 재미있어했을 정도였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이렇게 유쾌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여행 중에 만나는 즐거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남부의 풍경은 시내 쪽 비치와는 비슷한 듯 달랐다. 옥색의 물도, 파도가 잔잔한 바다도 비슷한데 무엇 때문일까 싶었는데 아마도 ‘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높은 언덕과 고갯길, 절벽, 그리고 람람산이 있었다.
호텔과 쇼핑 등 주로 머무는 관광객 대상의 시설이 모여있는 시내 지역인 타무닝의 투몬비치에서 바다를 보다 뒤를 돌면 호텔과 쇼핑센터들이 보였다. 그런데 남부 투어를 하면서는 바다를 보는 우리 뒤로 병풍처럼 푸른 산과 골짜기가 있었다. 아마도 타무닝 지역과 다른 느낌이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다른 투어업체를 이용해 오는 이들도 대부분 비슷한 코스를 들렀는데, 사람들은 모두 사진을 찍었다. 비슷한 포즈로, 같은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었다. 풍경 한두 컷을 찍고는 그늘에서 바다를 보거나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특히 정해진 포토존이 아니었음에도 같은 장소에서 계속 사람만 바뀌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뭘 저렇게 사진을 찍나. 어차피 나중엔 들여다보지도 않을 사진을 말이야.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인생샷 남기기 역시 여행을 즐기는 방법의 하나라고 여긴다. 우리가 느긋하게 바다를 보는 것도 여행을 즐기는 것이고, 인생샷 한 장을 건지는 순간을 즐기는 것도 여행의 모습 중 하나라고 말이다.
가이드는 도착지에서 한 팀씩 원하는 장소에 내려주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유쾌하고 깔끔했다. 우리는 한번 즐기는 여행이, 그에겐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니 어떤 기분일까 잠깐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내일은 또 다른 관광객을 만나 같은 코스를 가이드할 그에겐 어쩌면 늘 같지만, 결코 같지 않은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매일 같은 풍경을 보며 설명하는 하루를 보낸다고 해도 그 하루도 모두 같을 리는 없지 않을까. 역시 사람이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