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는 남미 여행을 마치고 (어째 쓰고 보니 '동남아 순회공연 마치고'의 느낌이지만) s님이 돌아오셨다. s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매주 글을 쓰고, 민화를 그리는 모임 '더불어숲'의 회원이다. 사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우리 모임은 동네 이웃 세 명이 모인 취미 동아리쯤 된다. 세 명 모임에 한 명이 긴 여행에 들어갔으므로 우리는 그간 겨울방학에 들어갔었는데, 이제 s님이 오셨으니 오늘부터 다시 모임을 재개했다. 말하자면 개학인 셈이다.
모임의 첫 시작은 e님과의 만남이었다. e님은 처음 나와 함께 에세이수업을 했던 분이다. 그래서 지금은 함께 쓰는 모임의 일원이지만, 여전히 나를 ‘쌤’이라고 불러주신다. e님은 처음 세 문장도 어려워하셨지만, 이제 세 장도 써내는 필력의 소유자가 되셨다. ‘아무리 봐도 아무 말 대잔치’ 같다며 난감해하시지만, e님의 글은 처음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 역시 (무엇이든 그렇지만) 글도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것이다.
e님이 어느 날 주민센터의 오카리나 수업에 함께 하자고 했다. 오카리나라면, 그렇다. 여러 해 전 ‘고구마처럼 생긴 악기’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도부터 솔까지의 계음을 익히는 것으로 짧은 음악 인생을 접게 했던 그것이다. 단언컨대, e님이 하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다시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악기이지만 아는 이의 권유에 솔깃해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오카리나 수업에 함께 참여하던 s님은 e님과 이미 영어 수업에도 함께 참여해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게다가 s님은 초등학생 피리 불기보다도 못한 수준의 우리와 달리 공연팀의 일원이시니 우러러 보였다.
우연히 e님과 글쓰기를 하러 가던 아침, 동네에서 s님을 만났고, 함께 해도 되냐는 말씀에 당연히 신이 났다. 이렇게 해서 동네 이웃이며, 오카리나를 함께 하는 세 명의 글쓰기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s님이 국선 입선경력의 민화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고, 역시 그분의 재능기부로 글쓰기 모임에 이어 민화 모임이 결성되게 이른다. 멋진 이름 ‘더불어 숲’이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한 달 넘게 방학이었으니 목 금 아침은 느슨했었는데 다시 일찍부터 9시 모임을 준비했다. 덕분에 오전 시간을 길게 쓰고, 부지런하게 쓰니 좋은 일이다. 여덟 시 반쯤 되어 내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을 치우고, 화장실을 한 번씩 들여다보는 움직임을 주시하던 강아지 루비는 뭔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낀 것이 분명하다.
방학을 갖기 전 목요일과 금요일 오전에 내가 이렇게 거실과 화장실을 한 번씩 정리하면 눈치를 채고 현관문을 열어달라고 안절부절못했었다. 잊고 있던 두어 달 전의 기억이 되살아난 걸까. 루비는 그때처럼 9시 10분 전쯤이 되자 현관문을 긁어댔다. 현관문 앞에서 오매불망 앉아 기다리는 녀석의 뒷모습에 웃음이 났다.
여행을 좋아하니 해마다 몇 번의 여행을 하곤 하지만 남미는 멀고도 멀다. 유럽도, 미국도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지만, 그 먼 미국에서도 또 한 번 환승을 해서 찾아가야 한다는 남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추픽추, 나스카 등은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마음속에 있다.
우리는 s님의 남미 여행담을 들었다. 아마도 소녀들처럼 눈이 반짝반짝했을 것 같다. 사진을 봐도, 영상을 봐도 실감이 나지 않는 그 풍경은, 다녀온 이의 경험담을 앞에서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가서 본다면 실감이 날까. 어쩌면 눈 앞에 펼쳐진 풍경 앞에서도 실감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가 가장 좋으셨어요?”라는 내 질문에 s님은 우유니 사막이라고 답하셨다. 끝이 없다는 흰 소금사막의 사진을 봤다. 몇 해 전 미국 서부의 데스밸리에서 만난 소금사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광활함이었는데 아마 직접 가서 그 풍경 앞에 섰더라면 너무 넓어 오히려 막막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남미 여행담을 들으며 외쳤다.
"4천만 땡겨주세요!"
언젠가 4천만 원을 땡기는 그날, 우수아이아의 세상 끝 등대를 보러 갈 참이라며 웃음이 터졌다. 뭘 해서 4천만 원을 마련해야 하냐며 또 웃었다.
다들 다음 주 글쓰기 주제를 받아들었다. 다음 주제는 ‘풍경’이다. 여행지에서의 낯설고 기이하며, 멋진 풍경을 잔뜩 보고 오신 분의 글도 궁금하고, 방학을 했던 우리들의 풍경도 궁금해진다.
두 분이 모임을 끝내고 돌아가신 후 잠시 생각했다. 다음번 주제 ‘풍경’에 대해서라면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러다 떠오른 건, 오전 두 시간 동안 ‘더불어 숲’의 친구들이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며 즐거워했던 그 풍경이었다. 그랬다. 멀리 있는 풍경만큼이나 멋진 것이 이렇게 가까이에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다시 '더불어 숲'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