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지나치던 42번 국도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좁은 마을 길을 올랐다. 국도를 오가는 차 소리가 멈추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 전원주택들이 마치 숨어 있는 듯 고요한 동네. ‘더림 레시피’는 그곳, 이천 마장면에 있었다.
입구에 주차하고 마당에 서니, 마치 또 하나의 다른 문을 열고 낯선 세상으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빨강 머리 앤이 튀어나올 것 같은 박공지붕의 흰 목조주택, 화단엔 별 모양을 닮은 패랭이꽃, 그리고 푸른 잔디 위의 티테이블.
부부가 예약제로만 운영하면서 한정식 코스요리를 내어주는 집이었다. 정원 못지않게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으로 가득한 실내 역시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큰 통창 밖의 푸른 풍경은 그대로 한 점의 그림같이 편안했다. 음식점이라기보다 잘 꾸며놓은 어느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앉은 느낌이었다.
한식은 코스로 제공되었는데, 익숙한 한식을 이렇게 내놓을 수도 있구나 싶은 낯선 비주얼에 우리는 연신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눈으로 한번 보고, 또 그 맛을 입으로 느끼면서 한 번 더 만족했다. 음식이 하나씩 서빙될 때마다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이렇게 담아 놓으니 정말 예쁘다든지 하는 말들로 바빴다.
음식은 맛으로도 먹지만, 분위기로 먹고, 행복으로도 먹고,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먹는다. 요리와 그 요리가 나오는 곳, 함께 먹는 사람들과 익숙한 교감. 결국 음식을 먹는다는 건 함께 하는 시간을 먹는 일이니 그 시간이 허기를 채우는 일뿐일 리가 없다.
사실 오늘의 이 시간은 지난봄, ‘첫 번째 쓰임’의 출간을 기념해 S님이 마련해주신 자리였다. 나는 전문 편집인이 아니고, 솜씨도 어설프니 오히려 민폐를 끼치는 것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계간 웹진 ‘쓰임’을 냈다. 나 혼자만의 전자책을 낼 땐, 그 결과물을 오로지 내가 감당하면 된다. 하지만 다른 분들의 원고를 받아 웹진을 펴내는 일은 처음 시작할 때의 의욕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돈이 될 것도 아닌 그 일을 그래도 꼭 하고 싶었던 이유는, 나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쓰는 분들의 글이 그저 사라지지 않고 한자리에 모여앉기를 꿈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쓰임’은 쓰는 시간을 함께하는 우리들의 ‘식탁’ 같은 것.
그 ‘첫 번째 쓰임’엔 나와 연결되어 함께 쓰고 있는 사람들의 글을 실었다. 그중 ‘더불어 숲’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분들이다. 글을 나누고, 오카리나를 하고, 민화까지 함께 그린다. 이런 ‘더불어 숲’의 S님 덕에 이번엔 야외로 나가, 그 이름처럼 푸른 숲을 가까이서 누렸던 하루였는데, 우리 모두 소풍 나선 기분이라며 신이 났다.
멋진 식사를 마치고, 이왕 야외로 나온 길에 디저트는 ‘딜라의 정원’에서 E님이 사주시기로 하고 다시 국도를 달렸다. 전날 내린 비로 사방이 깨끗하고, 햇살은 더욱 눈부신 오후였다.
나 역시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딜라의 정원’은 S님의 지인이 운영하시는 ‘느리지만 건강한’ 빵을 만드는 집이다. 스페인에서 직접 공수해서 제작하셨다는 화덕이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그 앞에서 잠시 빵이 구워지는 하루를 상상했다. 나무 장작이 타오르는 화덕 앞의 열기, 동글동글한 반죽이 알맞게 부풀어 오르며 내는 맛있는 빵 냄새. 밥 없이 빵만 먹고 살 수 있다고 외치지만, 정작 빵을 만들어본 일은 없는 나는 이렇게 빵이 구워지는 한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딜라의 정원에는 맛있는 빵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강아지처럼 목줄을 하고 산책하는 산양도 있고, 족보 있다는 수입 닭들도 있다. 특히 닭은 우리가 흔히 보는 양계장용 닭이 아니라, 그 깃털이 꽤 멋진 녀석들이었다. 사실 플라이낚시를 하는 나로서는 낚시 미끼를 만들 때 쓰는 주재료인 수입 닭의 깃털 값을 생각하며 침을 꿀꺽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었다. 닭들이 어쩜 저렇게 예쁘냐고, 낚싯바늘 만들면 좋겠다고, 그런데 저리 예쁜 것들이 또 튀겨놓으면 얼마나 맛있는 치킨이냐고. 기르는 분께는 애완용 닭일 텐데 이처럼 정신 나간 소리를 해서 웃음을 사기도 했다.
멋진 ‘딜라의 정원’에서는 근처 전원주택에 살고 계시는 K님도 함께 했다. 마침 오카리나를 함께 하고 계시니 우리와는 구면이어서 네 명의 대화는 편했다. 돌아오는 길엔 그분의 전원주택 마당에서 상추도 뜯어왔다. 양지 부근에 예쁜 전원주택이 많은 것을 지나다니며 봤지만, 실제로 들어와 볼 일은 없었기에 호기심이 가득이었다. 푸른 잔디 깔린 마당에 뛰어노는 강아지, 그리고 텃밭과 과실수 그늘. 그림 속에 나오는 것 같은 예쁜 집과 마당은 역시 버릴 수 없는 나의 로망이긴 한데, 일이 매우 많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구나 싶었다. 역시 로망은 로망으로 남겨둬야 하는 걸까.
푸르고 화사한 햇살 속에서 소풍과도 같은 시간을 보낸 하루였다. 똑같이 굴러가는 시간 속에서 잠깐 벗어나 낯선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시계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앨리스처럼.
“즐거웠어. 재미있었다”
혼잣말을 하며 낮에 얻어온 상추를 씻어 식구들의 저녁 식탁에 내놓았다. ‘더림 레시피’에서처럼 나도 작은 그릇에 상추를 꽃처럼 세워 담았다. 낮에 보낸 시간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시계 토끼와 함께 갔던 ‘이상한 나라’도 책장을 덮듯 지난 시간이 되었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문득 식탁 위의 푸른 상추를 보니 마치 여행지에서 가져온 기념품인 듯 보여 혼자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