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문을 닫았습니다
대학교 4학년 무렵부터 했던 과외지도는 그대로 학원으로 이어져 직업이 되었다. 가르치는 일에 관해서 누가 묻는다면,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결혼을 하고, 수원에서 천안으로 이사해 네 해를 사는 동안에도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무렵 수원으로 다시 이사 왔을 때, 살던 동네는 전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택지개발 이야기가 나왔고, 아파트 재건축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었다. 부동산이라면 내게 그것은 ‘관심 있는’ 일이었으니 이번에는 책을 싸 들고 독서실로 갔다. 땅굴을 파듯 하루종일 독서실에 앉아 석 달을 보내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동네 막다른 길엔 택지지구와의 경계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앞에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냈을 때 사람들이 지나가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막다른 길에 웬 부동산이래.
하지만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그 경계벽이 열렸고, 택지개발이 시작되었다. 여덟 해 동안 그 자리에서 때로는 ‘공인중개사님’, 혹은 ‘부동산 아줌마’, 어떨 땐 ‘복덕방 사장님’으로 불리며 삼십 대를 보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매도자, 혹은 매수자가 되어 부동산사무실을 드나들 때와 그들 가운데에서 ‘중개’하는 것이 같을 리는 없었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나의 첫 계약서는 키보드 자판을 친 덕에 손이 떨리는 걸 겨우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영수증은 따로 수기로 발행해야 했다. 난감해진 나는 임대인에게 영수증을 내밀며 속마음과 달리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영수증은 돈 받으신 분이 자필로 쓰셔야 합니다.”
그 임대인은 ‘젊은 분이 아주 일을 꼼꼼하게 하신다’라며 흐뭇한 얼굴로 영수증을 쓰셨는데, 막상 나는 그때까지도 책상 밑에서 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그 이후 택지개발이 시작되자 땅을 팔거나 사려는 사람, 집을 짓고 싶어 하는 사람, 임대나 매매를 원하는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일없이 커피 마시러 놀러 가는 이웃 하나 없던 나는 낯선 이들과 대화를 하는 일에 어느 만큼 익숙해지고, 요령도 생겼다. 그렇게 택지개발이 끝나고 나자 건축업자들은 이제 근처의 구옥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거래한 집 가운데 하나가 J의 집이었다.
J는 내가 가르친 제자 중 하나였는데,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다정한 얼굴로 인사를 하러 오곤 했다. 그런 J가 어느 날 죽었다. 마포대교에서 추돌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마감뉴스 속, 바로 그 사망자가 J였다.
몇 달 후 J의 부모는 집을 팔겠다고 찾아왔다. 그들이 처음 장만해 손수 지은 집이었다. 아들과의 추억이 담긴 그곳을 떠나 아파트로 가려 한다고 말했다. 위치가 좋았고, 세입자도 없었으므로 건축업자들은 바로 그 집에 흥미를 보였다.
계약을 하기 위해 건축업자와 J의 부모가 모여 앉았다. J의 아버지는 눈만 내리깔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인감도장을 아내에게 주곤 ‘당신이 알아서 하라’며 나가버렸다. J의 어머니는 부동산에 관해선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건축업자는 가격을 좀 더 깎기 원했고, 세금 관련한 조건도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하길 원했다. 공인중개사는 중간 입장이지만, 대부분은 당연히 거래를 빨리 성사시키는 쪽으로 무게추가 기운다. 나도 그랬다.
그들이 왜 소중한 그 집을 팔려 하는가 잊었다. 어떤 마음으로 일생 살아온 집을 파는가도 잠깐 잊었다. 결국 모든 조건은 건축업자들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 계약이 이루어졌다. 내게 인사하고 남편의 인감도장을 든 채 조용히 사무실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봤다. 계약이 성사되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며칠 후 J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아내에게 인감도장을 주고 나와버렸더니 하자는 대로 죄다 도장을 찍어버렸더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먼저 일어났으니 누굴 원망하겠느냐고 하던 그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마른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잠이나 좀 실컷 잤으면 좋겠어요. 마누라는 매일 울고, 나는 술 없이 도통 이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
나는 그 순간 계속 불편하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았다. 나는 한 건의 계약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된 걸까.
나 역시 몇 해 전 동생을 떠나보냈고, 그러니 아들을 먼저 보낸 부모의 삶이 어떻게 피폐해지는지 안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있었다. J를 알고, J의 부모가 어떤 맘으로 일생 살아온 집을 떠나려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어차피 그들은 어떤 조건이어도 받아들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일을 진행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얼마 후 그들 가족은 이사했다. J가 방글방글 웃으며 드나들던 빨간 벽돌집은 사라지고 새 원룸주택이 들어섰다. 그 집을 지날 때마다 J를 생각했고, 그 부모를 생각했고, 내가 하는 일과 그 일을 하는 나를 생각했다. 많은 것을 얻고 배운 여덟 해였지만, 더 오래 한다면 더 많이 얻고 배울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더 욕심부리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려던 순간, 바로 앞에 J의 아버지가 은행에서 나오는 걸 봤다. 차 문을 열고 나가 인사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리곤 조용히 다시 차 문을 닫고 말았다. 그가 탄 자동차의 뒤꽁무니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더 미루면 안 되겠구나.
결국 그날로 나는 부동산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관심 있는 분야가 직업이 된다는 건 좋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을 때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 어떤 일을 하든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고, 후회로 남은 일은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꿈꿔오던 건 글을 쓰는 일이었다. 그 일을 지금 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 만족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다만 그 어떤 일을 하든 ‘나’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이제 아는 사람이 되었다. 부끄러움으로 남을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눈앞의 숫자만 보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물론 살다 보면 자꾸 결심은 희미해지지만 적어도 잊지 않고 살려고 노력은 한다. 그럴 때마다 J가 살던 그 빨간 벽돌집을 떠올리곤 한다. 비록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집이지만, 내겐 여전히 ‘올바른 길은 이쪽’이라고 알려주는 이정표인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