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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해봐요'병의 상관관계

by 전명원

나 자신이 영업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나는 무엇이든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혼자 쓰거나 혹은 내버리는 쪽이 맘 편한 사람이었다. 물건에도 이러한 사람이, 물건이 아닌 어떤 ‘일’에 대해서라고 한들 다르지 않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내게 “같이 가” 또는 “같이 하자”라고 하면 대부분 거절 없이 함께했지만, 정작 내가 필요한 순간에는 상대방에게 그 말이 쉽지 않았다. 괜히 부담 주는 게 아닐까.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끌어내는 것 아니야. 속에선 이런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기에, 결국 나는 말을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 채 이것도, 저것도 대부분 그냥 혼자 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경계를 넘고, 껍질을 깨는 순간이 없진 않다. 물론 그런 순간은 친한 친구들 사이라고 해서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함께 하는 가족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나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런데 매번 어렵던 “해봐요” “함께 해봐요” 같은 소리를 요즘 나는 제법 자주하고 있다. 수십 년을 만나온 친구에게도 여전히 “생전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다”라거나, “같이 가자는 말도 없이 혼자만 여행을 다녀 서운하다”라는 등의 말을 매번 듣는 사람이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말은 어디까지나 ‘글쓰기 한정’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나의 “해봐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쓰기와 연관된 사람들인 거다. 나는 어쩌다가 이처럼 ‘해봐요 병’ 환자가 된 걸까.

어려서부터의 내 꿈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엄마는 중학생 때까지도 종종 글을 써 상을 타오던 나의 이야기를 하며 “너는 글을 참 재미있게 썼다”라고 했다. 결혼을 하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며 백일장이나 사보 공모 등을 거쳐 문예지에 수필 추천을 받았을 때도 엄마는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늘 사는 일은 바쁘고, 글을 쓰는 일은 사는 일 앞에서 자꾸 뒤로 밀리며 세월이 갔다. ‘네 글은 참 재미있었다’라고 말해주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신 자식에겐 죽음이 멀다. 언제나 곁에 있을 것만 같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면, 그제야 ‘이제 다음 차례는 나로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인생은 유한하다는 당연한 깨달음이다.


놓을 수 없을 것만 같던 핑계와 욕심을 버리고, 마음 깊숙한 곳에 밀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냈다. 글쓰기 강좌를 듣고, 출판 강의를 들었다. 글쓰기 모임을 하고, 책을 냈다.

이렇게 다시 글 쓰는 일 언저리에서 사는 동안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글을 쓰는 일이 좋다는 사람들을 더러 만난다. 물론 그들 모두가 작가가 되려는 꿈을 가진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글을 쓴다고 해서 누구나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쓰려는 그들을 볼 때마다 ‘해봐요’ 병이 도졌다. “한번 써봐요. 함께 해봐요.”


글은 사람이 쓴다. 필사를 하고, 서예를 한다고 해도 쓰는 이의 마음이 실리는 것이 글이다. 하물며 수필을 쓴다고 생각해 보라. 쓰는 이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수필을 쓴다는 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자기 마음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여주는 일이다. 그렇게 용기 낸 사람들, 혹은 그런 용기를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라면 저절로 나는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해봐요” “ 같이 해요” 이런 소리를 먼저 건네고 싶어진다. 사실은 그들이 잡아준 손의 온기로 나 역시 힘을 얻고 싶어진다.


하지만 같은 도로 위에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누구는 운전대를 잡고 제 맘대로 달리고, 누구는 정류장마다 섰다가는 시내버스에 앉아있다. 또 누구는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고 달리며, 또 다른 누구는 걷거나 혹은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고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오늘도 참지 못하고 “해봐요”라고 말하는 나는, 저마다의 다른 속도를 생각하면 내심 조심스럽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망설이면서 ‘해봐요’ 병과 나 사이를 저울질한다. 어느 때는 어차피 글이란 혼자 쓰는 건데 옆에서 추임새를 넣을 필요가 뭐 있어, 한다. 또 어느 때는 ‘쓰고 싶다’라는 마음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이 막막하던 어제의 나를 생각하며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한다. “한번 해봐요.”


역시 무엇이든 그 중심이 어디인가 찾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고, 나는 오늘도 이렇게 ‘해봐요’ 병과 밀당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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