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혹은 마음의 풍경 – 신문수
연초부터 반갑지 않은 독감에 걸렸지만,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왕 걸린 독감은 어쩔 수도 없는 일이니, 대신 외출을 자제하고 평소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 생각해보니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게다가 연초부터 읽은 책들은 대부분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올해 독서의 선구안은 나쁘지 않겠구나 싶은 기대감도 들었다.
‘풍경, 혹은 마음의 풍경 (신문수 저) ’을 읽는 내내 간만에 진지한 수필을 만났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독서량에 관한 한 기준이 있을 수 없으니 내 독서량이 많다 적다 평할 수는 없다. 다만 그저 꾸준히 읽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있는데 이런 독서의 반 이상은 수필이 차지한다.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면 글에도 유행이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그리고 요즘의 글에서는 종종 알맹이는 없고 분위기만 있는 것 같은 헛헛한 느낌을 더러 받곤 한다. 재기발랄함과 가벼움, 그런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난 이는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며 말했다. 경수필은 그저 신변잡기의 것으로 다소 폄하했고, 모름지기 수필이라면 중수필만을 진짜 문학적인 글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말한 요지였다. 내가 요즘 글을 읽으며 간혹 변죽만 울리는 속 빈 강정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해서 그 말에도 동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수필이라고 해서 한없이 가볍다거나, 중수필이라고 해서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글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굳이 경수필과 중수필을 나눌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 책의 글은 경과 중을 떠나 적당한 무게감과 깊이감이 느껴져서 꽤 좋았다. 물론 쉽게 쓸 수 있는 표현이 있다면 굳이 어렵게 말하지 말고 쉽게 쓰자, 는 내 생각과는 다른 표현도 많았으나 그 또한 괜찮았다. 나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사자성어를 인용한 부분이 좋았다.
일본 다도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센노 리큐는 어느 가을 아침 뜰에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친 바 있어서 빗자루를 집어 들어 뜰을 깨끗이 쓸고 주워 든 몇 닢의 낙엽을 드문드문 다시 뿌려 놓고 즐겼다고 한다. 등 뒤로 흘려보낸 세월이 적지 않은 나 같은 필부의 평범한 삶에서 새출발이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뒤돌아보지 않는 비장한 시작이라기보다는 리큐의 기발한 착상처럼 있는 것들을 여기저기 재배치해 보고 관습의 녹을 걷어내 일의 초발심을 되새겨보는 것에 가까운 것이리라. 공자가 말한 회사후소(繪事後素)가 시인 묵객의 전유물일 수만은 없을 터이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이따금씩 삶의 청사진을 새로 설계하고픈 욕심을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흰 눈이 내려 온 세상이 눈부신 설원으로 변할 때마다 눈의 염력을 빌어 내 마음을 깨끗한 백지로 만들고 그 위에 내 나름의 새로운 그림을 그려 보는 일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 본문중에서
회사후소(繪事後素)란 그림 그리는 일은 바탕을 먼저 마련한 후라는 의미로, 모든 일은 기본을 잘 갖춘 후에 실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논어(論語)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하와 공자의 대화에서 나온다.
자하가 “‘아름답게 웃는 얼굴에 보조개가 예쁘네. 아름다운 눈의 맑은 눈동자가 선명하구나. 흰 비단으로 광채를 내도다.’ 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라고 묻는다. 그 말에 공자가 말씀하시길 “그림을 그리는 일은 먼저 흰 바탕을 마련해놓고 난 뒤에 한다.(繪事後素)”라고 대답한대서 유래한다.
어제 읽은 책에 나왔던 이 사자성어가 마음에 남았는데, 오늘 마침 민화 수업이 있었다. 민화는 빈 종이에 본을 뜨고, 밑 채색을 시작한다. 그림은 한번 채색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가령 모란꽃을 채색한다고 하면 바탕에 흰색 혹은 다른 옅은 색을 칠한 후 다시 그 위에 ‘바림’이라는 일종의 그라데이션 기법을 이용해 입체감을 살린다. 본을 뜨고, 꽃잎의 바탕색을 칠한 후 그 ‘바림’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꽃이 꽃다워진다. 꽃잎 끝이 물들어 오는 듯한 그 작업은 바탕색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또한 그 덕에 돋보이는 것이다. 꽃잎뿐 아니라 초록의 이파리 역시 그 바림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생동감 있는 잎새의 느낌을 갖게 된다.
오늘의 민화 수업에서는 내내 많은 이파리를 바림했다. 어떤 것은 싱싱한 초록의 느낌으로, 어떤 것은 다소 시든 잎의 느낌으로 다양하게 보이기 위해선 그 바림이 과정이 그만큼 중요하다.
나는 여전히 바림작업을 해야 할 차례가 되면 긴장한다. 최종작업이니 그 어떤 것으로도 덮을 수 없는 단계이어서도 그렇지만, 그 바림에 따라 얼마나 그림이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지 보았으니 더더욱 조심스럽다. 행여나 실수라도 할라치면 그간 그린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될까 싶어 손이 떨린다.
나는 그리다 만 그림을 물끄러미 봤다. 커다란 바위 뒤로 모란이 여러 송이 피어있고, 모란 가지마다 크고 작은 이파리들도 빼곡하다. 바위위에는 이름 모를 새 두 마리가 앉아 깃털을 고르고 있다. 이파리와 꽃송이엔 바림의 과정이 필요하다. 오전 내내 수업 시간에 이파리 부분을 완성했다. 바탕색이 칠해진 끝부분에 다른 색으로 바림을 함으로써 잎새의 입체감과 생동감이 살아났다. 비록 초보의 어설픈 솜씨에도 그 차이가 느껴진다.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를 이야기하며 작가는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을 때마다 마음을 백지로 만들고 그 위에 새로운 인생 그림을 그려 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라고 했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살아볼 참이다. 흰눈이 쌓인 설원위에 새로운 그림을, 새로운 발자국을 내는 인생의 아침을 생각한다. 그 아침을 생각한다면, 소리없이 눈이 내리는 기나긴 어둠의 밤도 견딜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