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쓰고 있는 레이저프린터기는 3년 전쯤 산 것이다. 내 원고뿐 아니라, 글쓰기 수강생들의 원고를 프린트하는 일도 잦으니 내겐 컴퓨터 다음으로 요긴한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얼마 전부터 경고문구가 뜨기 시작했다. ‘전사벨트교체준비’.
궁금한 건 일단 검색하고 본다. 전시 벨트? 전사 벨트? 용어도 희한한 그것은, 알고 보니 부품만 사다가 혼자서 교체할 수도 있다는 평이 많았다. 서비스센터의 도움을 받으면 편하겠지만, 반도 안 되는 가격에 할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덜컥 부품을 샀다. 동영상과 안내서를 놓고 씨름하듯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그래도 해냈다. 나 프린터기 수리하는 여자라 이거야! 혼자 으쓱했다.
하지만 사는 일이 그렇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튀어나오는 법이다. 파도가 없이 잔잔한 삶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프린터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정착기 교체’라는 경고가 뜨기 시작했다. 전사 벨트와 달리 정착기는 프린터를 분해하는 수준의 과정이 필요했다. 아서라, 이건 도전하는 거 아니야! 마음속의 내가 외쳤다.
교체해 볼까 하는 맘을 포기한 채 경고문구를 무시하고 재부팅을 해가며 계속 쓰면서도 불안했다. 이거 어느 날 갑자기 인쇄가 안 되면 어쩌지 싶은 불안함에 수강생들의 과제는 메일로 들어오는 즉시 피드백을 해서 바로 인쇄를 해두었다.
정착기 교체 준비 문구가 뜬 후 일정량을 인쇄하고 나면 더 이상 작동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쇄를 하면서도 멈추는 그날이 오늘일까, 내일일까, 알 수 없어 늘 불안한 맘이었다.
정착기에만 신경 쓰던 어느 날이었다. 난데없이 새로운 경고문구가 떴다. ‘이미징 유닛 교체 준비’. 이건 또 뭐란 말인가.
검색의 신답게 또다시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건 ‘드럼’을 지칭하는 듯했다. 황금의 손을 가진 자들을 위해 인터넷에선 정착기도, 드럼도 다 팔고 있었지만 나의 한계는 역시 전사 벨트 교체까지였다. 경고문구를 무시하고 인쇄를 하면서 이제 두근두근함은 두 배가 되었다. 어느 날은 정착기 교체 준비, 또 어느 날은 이미징 유닛 교체 경고문구가 번갈아 가며 떴다.
그러던 어느 날, 걱정하던 사태가 벌어졌다. 인쇄가 덜컥 멈춘 것이었다. 계기판엔 ‘이미징 유닛 교체’라는 문구가 깜빡였다.
집에 온 수리기사는 기기를 연결해 검사를 한후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물었다. 번갈아 가며 경고문구를 내뱉던 둘 중 먼저 생을 다한 건 이미징유닛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징 유닛만 교체한다고 해도 곧 정착기가 따라서 멈출 것이니 결국은 둘 다 교체가 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비용이었다. 정착기와 이미징 유닛 둘 다 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과, 같은 모델의 새 프린터를 사는 것의 가격 차이는 5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29만 원을 주고 두 부품을 수리할 것인가, 아니면 35만 원을 주고 아예 새로 살 것인가.
프린터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품이라는 그 두 가지를 교체한다면 새 프린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 그리고 값 차이가 얼마 되지 않는데 그렇다면 차라리 버리고 새 프린터를 사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 내 안에서 두 가지 생각이 충돌했다. 난감한 얼굴로 수리기사를 보며 웃었는데, 그도 역시 같은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외관이며 전체적인 상태가 말끔하긴 해서 참 애매하네요.
몇 초쯤 내 프린터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기로 맘먹었다. 부품을 갈아 다시 새것처럼 쓸 수 있다면 좀 더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분해하고 부품을 교체하는 데엔 40여 분쯤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수리가 끝난 후 프린터에선 다시 생생한 인쇄용지가 착착, 소리를 내며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부품을 바꾸고 나니 이렇게나 선명하게 제 기능을 하는데, 역시 통째로 내버리지 않길 잘했어. 흐뭇한 마음으로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누구보다 왕성하게 각종 스포츠를 즐기던 친구는 난데없이 허리디스크로 인해 꼬박 한 달을 고생했다. 어쩌다 보니 매주 목요일 진료를 끝내고 나와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이 일과가 되었는데 당연히 대화의 주제는 건강, 그리고 나이 드는 일에 관해서였다.
나는 프린터 이야기를 꺼냈다. 어쩐지 새것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고. 부품을 바꾸면 다시 제 기능을 할 수 있는데 몇만 원 차이 안 난다는 이유로 통째로 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어쩐지 그 프린터가 인생처럼, 삶처럼 느껴졌다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내 프린터를 생각했다. 차라리 새것으로 바꾸는 것이 여러모로 경제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프린터에게도 다시 시작할 기회가 필요하다. 아직 그에겐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야, 이럴 날이 올 줄 몰랐는데 여기도 아프고, 또 저기도 아파.’ 좀 전까지 친구랑 우스갯소리처럼 한탄하던 것을 떠올렸다.
오늘은 전사 벨트가, 내일은 정착기가, 또 어느 날엔 이미징 유닛이 제 기능을 못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오늘은 전사 벨트를, 내일은 정착기를, 또 어느 날엔 이미징 유닛을 교체하면서 그렇게 살아봐야지.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기회가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