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이 난수표 같은 건…?”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에 깨알 같은 숫자들이 쓰여 있었다. 아빠의 글씨체는 바탕체를 약간 흘려 쓴 듯한 모양이었는데 숫자만큼은 반듯하게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궁금함은 이내 엄마의 한마디로 풀렸다.
“그거 느이 아빠가 매일 아침 혈압 재고 나서 써놓는 거야. 혈압약 먹고 매일 저렇게 써놓으면 뭘 해, 술담배를 끊어야지. ”
마치 난수표 암호 같은 숫자들로 빼곡한 아빠의 수첩을 좌르르 넘겨봤다. 무엇인지 알고 나서 보니 그 숫자의 의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날짜, 최고혈압, 최저 혈압은 물론이고 맥박수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아빠는 몸에 좋다면 뭐든 찾아드시는 사람이었는데 그 ‘몸에 좋다면’의 기준이 때로는 몬도가네를 떠올리게 하는 것일 때도 많았다. 엄마는 매번 말했다.
“백날 몸에 좋은 것을 먹어봐야 소용없다. 몸에 진짜 나쁘다는 술담배는 못 끊으면서….”
엄마의 연이은 지청구에도 술담배를 끊지 못하던 아빠였지만, 자연스럽게 술이 멀어지는 날이 왔다. 몇 번의 혈관 수술을 거치며 아빠는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마시고 싶은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고 했다. 혈압, 당뇨…. 먹는 약은 자꾸 늘어갔고, 매일 체크해서 기록하는 항목은 혈압과 맥박뿐 아니라 당뇨 수치까지 그 목록이 늘어났다.
혈압이나 당뇨는 가족력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고혈압, 당뇨를 모두 가지고 있던 아빠와 그 두 가지가 모두 없던 엄마. 나는 엄마 쪽을 닮았는지 늘 혈압이 낮은 편이었다. 어쩌다 아빠가 혈압을 잴 때 옆에서 나도 스윽, 팔을 내밀며 말했다. “나도 혈압 재줘.”
그때마다 늘 나의 최고혈압은 세 자리를 겨우 넘기기 일쑤였기에 고혈압이란 나와 먼 이야기일거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제 내게도 고혈압을 걱정해야 할 날이 왔다.
내가 다니는 내과에선 내원한 모든 환자가 진료 전에 반드시 혈압을 재야만 한다. 그 덕에 굳이 궁금하지 않던 나의 혈압수치를 눈으로 확인한다. 병원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내 발로 병원을 찾았을 때는 몸 상태가 멀쩡할 리가 없다. 몸살 기운이 있거나, 열이 나거나, 혹은 장염, 그도 아니면 목이 아프다든지 하는 증세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였을까. 늘 혈압은 높은 편이었다. 우리가 정상치라고 알고 있는 최고 120에, 최저 70의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당연히 고혈압의 범주에 드는 수치를 받아들였다.
대단한 증세도 아닌, 목이 좀 불편해서 찾은 그날의 혈압도 최고 145의 수치를 나타냈다. 의사는 목을 꼼꼼히 보고 처방을 해주고는 나의 혈압에 대해 말했다. 늘 다른 증세로 몸이 안 좋을 때 오긴 하지만 매번 수치가 높은 편이니 보름 정도 집에서 계속 혈압 체크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계속 이 정도의 수치가 유지된다면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집에 돌아와 구석에 박아둔 혈압계를 꺼냈다. 며칠간의 혈압은 다소 들쑥날쑥했는데 어느 날은 140이 넘었다가, 또 어느 날은 120대로 떨어졌다. 목이 나으면 바로 정상치로 떨어질 줄 알았던 혈압수치가 계속 널을 뛰자 나는 그제야 혈압 재는 일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의사의 조언대로 화장실을 다녀온 후 바른 자세로 탁자에 앉았다. 혈압계를 꺼내어 팔뚝에 두르고 심호흡을 한 후 기계를 작동시킨다. 위이이잉, 팔에 압력이 가해지고, 혈압계 화면에 숫자들이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내 혈압을 재는 과정을 다소 긴장된 눈빛으로 주시한다. 체크가 끝나고 액정에 뜬 숫자에 따라 매번 마음도 달랐다. 어느 날은 다행이군, 또 어느날은 어라, 높네! 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 숫자들을 기록했다, 오래전의 아빠처럼.
며칠간 혈압을 재다 보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게 된 것이 있다. 당연하겠지만 혈압은 몸의 상태를 가감 없이 숫자로 드러냈다. 아침에 일어나 다소 찌뿌둥하거나 미약한 두통이 있는 날이면 여지없이 혈압은 높았고, 몸이 가뿐하고 머리가 맑은 날은 정확하게 정상치의 범주에 있었다.
다행과 염려의 마음을 오가며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 혈압을 재고 있다. 의사의 말대로 두 주쯤 매일 체크하고 나면 나의 난수표 기록은 어떤 숫자들로 채워지려나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부분에서 나는 아빠와 달리 수첩에 숫자를 기록하진 않고, 컴퓨터에 기록해 둔다. 하지만 나 역시 탁자에 경건한 자세로 앉아 혈압을 재고, 그 숫자를 키보드로 두드려 기록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매번 아빠의 난수표 수첩이 떠오른다.
내가 며칠간 적어둔 숫자들이 컴퓨터 화면에 있다. 내가 아빠에게 간첩이냐, 누가 보면 난수표 암호인 줄 알겠다고 놀리던 그 숫자들. 어쩌면 그 숫자들은 정말 암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결국 그 숫자들이 살아있음의 기록이라는 것뿐이다.
삶이 내게 보내는 암호와도 같은 나의 혈압, 그리고 맥박을 나타내주는 숫자들을 물끄러미 봤다. 알 수 없는 숫자들은 컴퓨터 화면에, 혈압계 액정에, 그리고 내 안에서도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 분주함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