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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을 아직 기억한다

by 전명원

孟母三遷之敎 라는 말이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뜻으로 인간의 성장에 환경이 그만큼 중요함을 강조할 때 종종 쓰이는 말이다. 이처럼 ‘현모’였을 수도, ‘대치동 엄마’였을 수도 있는 맹자의 어머니는 우리 집에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이사는 많이 다녔다. 아주 어릴 적 살았던 수원의 세류동에서 매교동, 그리고 정자동을 거쳐 동수원에 터를 잡은 것만도 벌써 사십 년이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 우리 가족이 살던 정자동의 주택에서 이사하게 된 곳은 동수원의 새로 지어진 아파트였다. 그저 ‘수원’이었던 시절에서 ‘동수원’이라는 이름으로 도심이 확장되어 가던 초기였다. 집에서 도보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던 북문 근처의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당황했다. 수원이라면 남문이 익숙하던 그 시절, 그 남문을 지나 한참 더 동쪽으로 뻗어나간 동네는 낯설었다. 게다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심각한 길치라 한번 갔던 길을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이사 갈 집 가봤으니까 잘 찾아올 수 있지? 66번 타고, 동수원병원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서 길 한번 건넌 다음에 약국 옆 골목으로 쭉 들어오면 돼.”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데 나는 이사 당일 아침부터 심란했다. 한참 이사가 진행되고 있을 시간, 학교에 앉아 있던 나는 집에 갈 걱정이 태산이었다. 낮에도 낯선 길을 자율학습이 끝난 밤늦은 시간에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66번 시내버스 역시 내겐 에버랜드로 소풍 갈 때나 타는 것이지 집에 갈 때 타는 버스는 아니었던 거다.

“저거 타면 된다. 66번이야. 잘 찾아가라!”

걱정하는 나를 따라온 친구가 버스정류장에서 엄마와 똑같이 말했다. 잘 찾아가라. 잘 찾아갈 수 있지. 나는 속으로 외쳤다. 무서워. 나 집 못 찾아갈 것 같아.


밤 열 시에 자율학습이 끝나고 정류장까지 걸어 나와 66번 버스를 타고 화서동에서 우만동까지 오는 동안 이미 시간은 밤 열한시가 다 되었다. 엄마가 내리라던 동수원병원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승객은 나 혼자였다. 사방은 무거운, 혹은 무서운 어둠. 늦은 밤의 고요. 나는 뛰다시피 건널목을 건너고, 불 꺼진 약국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누군가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소스라치며 걸음을 멈추곤 했는데 그때마다 뒤따라오는 발걸음도 멈췄다. 따라오는 발걸음의 정체는 나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떨림은 멈추지 않아 언덕 위의 아파트 단지를 향해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

오른편엔 불 꺼진 주택 몇 채가, 그리고 왼편엔 뜬금없이 도시의 논이 펼쳐져 있었다. 깜깜한 논이 있다는 것도 무서운 판에, 그 논에선 개구리가 우렁차게 울어댔다. 개구리들이 울어대다가 내 앞으로 튀어 오르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뛰면서도 흘깃흘깃 왼편 논에 눈길을 줬다. 논 너머에는 길고 높은 담장이 보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저런 것이 있었던가. 그 담장에는 조명을 켜두었기에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뛰는 골목까지 그 불빛이 비춰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 환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안심이 되다가, 막상 건물은 보이지도 않고 높고 긴 담장이라니 싶어 이상하기도 했다.


새집으로 이사한 첫날 밤. 나는 그렇게 공포에 떨면서도 집에 잘 도착했다. 어둠도 무섭고, 낯선 동네도 무섭고, 울어대는 개구리도, 어쩐지 섬뜩하게 높다란 담장 너머도 무서웠다. 그런 무서움을 뚫고 도착하기까지의 내 모습을 무용담 늘어놓듯 가족들에게 자랑하고 나서야 물었다.

“대체 그 건물은 뭐 하는 곳이길래 그렇게 담이 높은 거야? ”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거기 교도소야. ”


그렇다. 자식 교육을 위해 맹자 엄마는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던데, 우리 엄마는 하필 교도소 옆으로 이사를 했던 거다. 경악하는 내게 아주 고급 정보를 주듯 덧붙이기까지 했다.

“얘, 이제 수원은 앞으로 이쪽 동수원이야. 교도소도 이사 갈 거래.”

하지만 엄마의 말과 달리 교도소는 금방 이사 가지 않았다. 없어진다던 교도소 대신 구치소가 들어섰다.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엔 구치소가 없어지는 대신 그 자리에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고층 건물의 구치소가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우리 가족은 교도소보다 더 빨리 그 동네를 떠났다.


그 집에서 살던 몇 해 동안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동네에 사는 동안 밤이면 아파트 진입로를 들어설 때마다 빈 도시락통 속의 포크든, 필통 속의 볼펜이든 하나씩 쥐고 걷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는 사이 무겁기만 하던 어둠의 무게에도 적응했고, 내 발소리만 울려 퍼지는 고요에도 적응했다. 가끔은 어둠 속에 서서 멀리 높고 긴 교도소의 담장 위에 라이트가 움직이는 걸 바라보기도 했다. 여름이 오면 개구리가 우렁차게 우는 소리도 나름 정겨웠다.


‘감옥’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야 한다니 난감하던 차에 떠오른 건 그 시절의 수원교도소였다. 문득 그곳이 궁금해진 나는 인터넷에서 ‘수원구치소’를 검색했다. 그러다가 몇 줄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학군이며 환경을 위해 구치소 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았다.

기사를 보던 화면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 교도소였으며, 구치소였다가, 이제는 현대식 구치소가 된 그곳. 사람들은 당연히 감옥을 터부시한다. 교육환경에 좋지 않고, 집값이 오르는 데도 방해가 된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수원구치소의 옛 모습을 기억한다. 이제 흔적도 없이 도로가 되고, 아파트가 들어서 버린 그곳의 옛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옛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나는 포크를 꺼내어 손에 쥐고 씩씩하게 밤길을 걷는 여고생이 된다. 제일 날카로운 펜을 꺼내어 꽉 쥐고 걸으면서도 개구리 소리에 맘을 뺏기는 여대생이 된다.

동네가 변하고, 시절이 변했지만, 그때를 여전히 기억하는 내가 있다. 어쩌면 나만은 변하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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