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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1

by 전명원

바르셀로나를 떠나 세비야로 가는 길엔 국내선 비행기 대신 고속열차 렌페를 타기로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는데 그 이른 시간에도 넓디넓은 산츠역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렌페가 향하는 곳은 다양했다. 스페인은 교통수단으로 기차가 굉장히 활성화된 나라임이 분명하다.

세비야까지 6시간의 긴 여정. 노선도를 보니 바르셀로나에서 왼쪽 위로 올라가 마드리드를 지나 다시 내려오는 형태이다. 카탈루냐 지방인 세비야에서 안달루시아 지방인 세비야로 가는데 세비야는 포르투갈 국경과 꽤 가까운 지역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목적한 곳은 바르셀로나, 세비야, 그리고 리스본이다. 루트를 짜며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세비야와 그라나다였다. 둘 다 들르자면 바르셀로나와 리스본에서의 일정을 줄여야 했다. 늘 짧은 일정으로 바쁘게 다녔던 사람에게 11박 13일의 여행은 한없이 길 것 같았지만 막상 가고 싶은 곳들은 너무나도 많다는 걸 알았다.

결국 그라나다를 포기하고 세비야를 목록에 넣었다.


한때 나는 빡빡한 여행 일정을 짜고 도장 깨기를 하듯 다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낸 시간인데. 여기까지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데. 언제 또 와보기 쉽지 않으니 왔을 때 하나라도 더 보자. 나는 이런 여행자였다.

하지만 이제 다르다. 언제인가부터 나는 여행의 여유를 즐기는 여행자가 되었다. 물론 도장 깨기를 하듯 여행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여행자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이고, 나는 이제 느슨한 여행이 더 좋은 여행자가 되었을 뿐이니까.


스페인의 기차는 쾌적했다. 객차 내의 여행객들은 대부분 가족이나 부부로 보였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는 이도 있다. 6시간은 너무 길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수월했다. 창밖엔 스페인의 태양이, 끝없는 푸르름이 이어졌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세비야의 산타 후스타역.

구글을 켜고 역 앞의 정류장에 앉아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할아버지가 길을 물었다. 그의 언어가 스페인어인지 포르투갈어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나는 당황해서 스페인어를 못한다고 하니 할아버지는 오히려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정류장에 붙은 노선도 세 가지를 가리키며 뭐라 뭐라 혼잣말처럼 하며 웃었는데, 아마 가려는 목적지를 향하는 버스가 그중 어떤 것인지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정류장에 선 무리는 모두 기차에서 내린 듯한 여행객들이었다. 다들 손에 핸드폰을 켠 채 들고 있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고 구글을 창에 띄운 핸드폰을 켜 들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구글을 켜고 여행한다. 굳이 누군가에게 애써 묻지 않아도 여행이 가능하고 편리하고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삭막하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며 말을 건네는 순간, 인사를 주고받으며 웃음을 나누는 순간. 그런 순간들이 구글에는 없다.


이번 여행에서 서로의 관심사는 다르다. 미술품 보는 걸 좋아하는 친구는 세비야 미술관으로, 유럽의 성당에 관심 있는 천주교 신자인 나는 사전예매가 마감된 세비야 대성당의 현장 구매표를 찾아보기로 했다.

같이 여행와서 모든 시간을 함께할 수도 있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가끔 이처럼 헤쳐 모여 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서로 각자의 여행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와 함께 할 때의 연대감 못지않게, 혼자만 즐기는 자유의 시간도 여행에선 필요한 법이니까.


다음날 들어갈 수 있는 대성당의 현장 구매표를 구하고 나니 마음이 느긋해져서 세비야의 예쁘고 아기자기한 골목을 혼자 걸었다. 스페인답게 골목마다 맛있는 하몽 샌드위치를 파는 집들이 흔했다. 모두 ‘오리지널’이라고 광고했는데 어쩐지 우리네 ‘원조’를 내세우는 먹자골목 간판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하몽외에도 바르셀로나의 것과는 조금 다른 안달루시아식 추로스를 파는 집 앞에는 긴 줄이 섰고, 우스갯소리로 ‘스페인 짚신’이라 부르는 에스파듀 매장에선 색색의 고운 신발들이 지나는 사람의 눈길을 잡았다.

기념품 자석을 사고, 오렌지가 유명한 곳답게 오렌지로 만든 이런저런 상품을 구경했다. 딱히 소용이 닿지 않을거라 생각하면서도 소소한 한둘씩의 물건을 자꾸 담게 된다.

햇살이 눈 부신 세비야의 거리엔 건물과 건물의 옥상에 흰 천을 차양처럼 걸어놓았다. 자연스럽게 거리엔 그늘이 생기고, 인공적인 아케이드가 아닌 흰 차양이 나부끼는 독특한 감성의 세비야 거리 풍경이 만들어졌다. 그 흰 차양 아래를 느긋하게 걸으며 세비야의 오후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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