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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2

by 전명원

세비야에선 2박 3일을 머물기로 했다. 가는 날과 오는 날은 뺀다면 오롯이 시간을 다 쓰는 건 하루뿐이다. 가보기로 맘먹은 곳들을 하나씩 들르기 시작했다. 황금의 탑부터 시작해서 세비야 대성당, 스페인광장까지 꽤 많이 걸어야 하는 날이었다.


황금의 탑을 지나 인디아스 고문서관에 들어갔다. 도시 자체가 오랜 역사가 있는 곳답게 인디아스 고문서관 역시 157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기본 몇백 년은 우스운 동네다. 1784년부터 고문서관으로 쓰인 이 건물엔 주로 신대륙 발견과 관련한 고문서들이 보관된 모양이다. 대항해 시대의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고, 고문서관이라는 이름답게 길고 넓은 복도 벽면에는 마치 도서관처럼 파일박스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아마도 그 안에 보관되고 있을 종이와 글자들을 생각했다.


유럽대륙의 서쪽 끝이 땅끝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시대에 누군가는 그 바다 너머에 새로운 당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대항해가 열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이르는 항로를 개척한 것도 이 시기이다. 특히 그의 관은 고문서관 바로 건너편 세비야 대성당에 있기도 하다.


모두가 끝이라고 믿을 때, 그것은 어쩌면 시작이라고 다른 꿈을 꾸었던 사람들의 기록이 모인 곳, 인디아스 고문서관. 박물관처럼 많은 유물이 전시된 것도 아니고, ‘아마도’라는 짐작으로 벽면을 온통 메운 수많은 파일 박스를 들여다볼 뿐이다. 그런데도 인디아스 고문서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곳이었다.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로 가득한 오래된 건물 속의 오래된 글자들을 상상하는 일. 알아볼 수 없고 읽을 수도 없으나 시간의 기록으로 가득 찬 그 공간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바로 건너편 세비야 대성당 앞의 소란스러움도 사라지고, 마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 역시 글을 쓴다. 내가 쓴 글은 얼마나 오래 남을까.

나보다 오래 존재할 수도, 혹은 그 이전에 이미 잊힐 수도 있다. 나는 고문서관에 가득한 글과 종이를 보며 나와 내 글을 생각했다.


한참을 머물다 인디아스 고문서관을 나왔을 때, 밖은 눈부신 햇살이었다. 순식간에 서늘함은 사라지고, 고요함 대신 소란스러움이 가득 찬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건너편의 세비야 대성당. 세계 3대 성당이라는 곳.

유럽은 성당이 골목마다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흔하다. 그래서인지 세비야 대성당을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찾아간 세비야 대성당은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였다. 성당임에도 입장료를 받으며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지이긴 했지만, 세비야 대성당은 성당으로 존재했다. 방금 건너편의 고문서관에서 만났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다시 만날 수도 있다. 그 유명한 콜럼버스의 관이 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세비야를 돌아보며 느낀 건 그들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였다. 때로는 쇠락한 과거의 영광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전히 빛나는 자부심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어떤 쪽이든 그들에게 이런 역사가 있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는 건 부러운 일이다.

나는 바르셀로나보다 세비야가 맘에 든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가 이곳저곳에서 들은 바로는 나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였다. 너무 거대하고, 너무 멀리 있는 듯 느껴지는 바르셀로나에 비해 세비야는 뭐랄까, 좀 더 친근하면서도 따뜻했다. 어쩐지 정감 있는 도시란 생각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한 걸까.

활기차고 오밀조밀한 골목으로 가득한 도시. 사람들이 비켜설 곳도 마땅치 않은 좁은 길로도 차들은 오갔다. 그런 골목을 한참 걸어 스페인광장에 도착했을 땐, 바로 전에 지나온 골목을 상상할 수 없는 그 광활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고, 정원에선 시원한 분수가 물을 내뿜었다. 그리고 회랑에선 플라멩코 버스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아주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열정적으로 플라멩코를 췄다. 이처럼 눈 부신 태양을 가진 나라의 사람들은 그만큼 열정적인 걸까. 플라멩코의 원산지는 바로 이곳 세비야라고 한다. 어쩐지 열정적인 세비야의 한 모습을 만난 것만 같다.


바르셀로나에서와 마찬가지로 세비야 역시 스페인광장을 끝으로 마음에 두었던 곳들을 대부분 다 돌아봤다. 여행지에서 몇 개를 본다고 계획한들 그것이 그곳의 전부일 리는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맘먹은 대부분 보았고 심지어 세비야는 참 좋았다.

이제 여행도 중반을 넘어서고, 내일은 리스본으로 떠난다. 그곳에서의 3박 4일이 이 여정의 마지막 일정이다.

멀리 두고 온 것들과 두고 온 일들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아직 나는 여행 중이다. 먼 곳의 나는, 여전히 먼 곳에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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