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음에 올 때 반찬을 해다 줄게요.“
K 님의 말을 흘려들었는데, 막상 다음 주가 되어 모임에 나타난 그분의 양손에는 정말로 커다란 보냉가방이 들려있었다. 그 가방 안에는 열무김치, 깻잎김치, 그리고 양념장, 돌김에 다진 마늘까지 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가방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반찬 그릇들을 보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임을 끝내고 가는 길에 일일이 소분해서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주시는 K 님의 손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오랜 세월, 집안일이며 남을 돕는 일을 겁내지 않은 손이었다.
”꼭 친정 왔다가는 사람 같아요.“
K 님이 챙겨주신 반찬 그릇들이 들어 묵직해진 가방을 받아 들고 나오며 내가 한 말은 진심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2017년이었다.
그날은 때로 아주 멀고, 때로는 여전히 어제인 듯 가깝다. 어느 날은 까맣게 잊은 것만 같고, 또 어느 날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선명하다.
결혼하고도 부모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살아온 나는, 어쩌면 진정한 독립이란걸 해보지 않았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부모님 역시 늘 ‘시집을 보낸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이 가깝다는 핑계로 점심마다 부모님이 식탁에 함께 앉았고, 저녁에 먹을 반찬을 들고 오기 일쑤였다. 철마다 엄마의 김치를 먹었고, 그건 언젠가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날이 올 거라는 걸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내게는 숨 쉬는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그해 5월 이후, 나의 삶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당연히 그중엔 엄마의 음식도 있다. 특별한 날이면 오래 끓인 갈비찜을, 냉동하지 않은 생선을 만나면 팬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고등어를 내어주시곤 했다. 아무리 김치를 많이 먹지 않아도 냉장고에 채워두고 있어야지, 하시며 매번 담근 김치를 주셨다. 이제 나는 유목민처럼 이곳저곳에서 반찬을 사고, 김치도 사 먹는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엄마의 김치맛을 찾을 수는 없으니 그저 먹는 사람이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쟤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라며 늘 엄마가 챙겨주시는 것에만 익숙했던 나는 살림에 관해서라면 이처럼 여전히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모자란 오십 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K 님이 챙겨주신 반찬들을 들고 와 저녁 식탁을 차렸다. 열무김치, 깻잎김치, 그리고 조미하지 않고 구운 김과 거기에 얹어 먹을 양념장을 꺼내놨다. 얻어온 반찬들로만 한 상을 차리고 남편과 둘이 밥을 먹었다.
양념장에 구운 김을 싸 먹고, 깻잎김치와 열무김치를 올려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점심을 빵 한 조각을 때워서, 라는 건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누군가 만들어준 반찬을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팔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서둘러 만들어낸 음식이었다.
나는 K 님의 투박한 손을 생각했다. 엄마도 요리할 때 맨손을 겁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춧가루 양념도, 간장이며 소금도 맨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버무렸다. 그 덕에 나는 컵 하나를 씻어도 고무장갑 없이는 손을 대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다. 엄마의 맨손 덕분이다.
”반찬 다 먹었니? 다 먹었으면 빈 통 가져와라. 다시 또 담아줄게.“
엄마는 늘 말했었다. 하지만 게으르고 철들지 않는 딸은 나이가 들어서도 대답만 하고 빈 통을 가져가는 걸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다. 결국 엄마가 와서 빈 통을 가져갈 때까지 집에 반찬통을 쌓아두었다.
만약, 지금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하는 상상을 가끔 해본다. 동네의 연세 드신 어르신들을 뵐 때면 돌아가신 내 부모의 나이를 가늠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2017년 5월에서 부모님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지금도 흐르고 있다면, 어쩌면 나는 좀 더 철이 든 딸이 되어있을까.
냉장고에 자리 잡은 K 님의 반찬통들을 다시 본다. 빈 반찬통에 무언가 다른 음식으로 채워드릴 재주는 여전히 없지만, 반찬통에는 음식만이 아니라 마음이 함께 담겼다는 걸 이제는 어렴풋이 알겠다. 어쩌면 나는 조금, 아주 조금은 철이 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