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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남 Feb 01. 2020

아빠의 식탁

내 아내

아빠의 식탁 


집이 마음에 들었다. 선영이와 또 아이가 하나쯤 더 생겨도 살기에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이사 갈 곳은 목동 12단지에 있는 5층짜리 작은 아파트였다. 1층이었는데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면 잔디가 깔린 조그만 정원과 그곳에는 감나무 두 그루와 라일락 그리고 목련도 있었다.  


이사를 하기 위해 짐을 정리하는데 침대 밑에서 세숫대야에 담긴 정체 모를 비닐봉지가 나왔다. 세숫대야는 신혼 초 아내와 함께 쇼핑하면서 필요할 것 같아 산 것인데 결국은 안 쓰게 되어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비닐봉지 안에는 급한 대로 먹으려고 처가에서 얻어온 2되 정도 쌀이 들어있었다.  나도 놀랐고 아내도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는 결혼 후 수년간 집에서 밥을 지어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현실이 그랬다. 아침은 달걀 프라이나 소시지 볶음으로 때우고 때로는 거르기도 했다. 점심과 저녁은 서로의 회사에서 먹었고 주말이면 친가나 처가에 가서 먹었다. 

 

친가에는 늘 먹을 게 많아서 선영이는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곳에는 맛있는 것도 많고 엄마 앞에서는 절대 통하지 않던 여느 4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릴 수 있으니 말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어리광을 부리다 제 엄마에 의해 방으로 끌려가서 정신교육을 받고 나오면 30분 만에 다시 의젓한 어린이로 돌아가곤 했다. 할머니 댁에 자주 가서인지 선영이는 어린애답지 않게 어른 입맛을 갖고 있었다.

   

가끔 나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을 때마다 어머니 밑에서 지낼 때가 그립기도 했고 어머니와 아내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 가끔은 아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어머니에게 윤정이가 밥을 안 해 주어서 힘들다는 투정도 부렸다. 그리고 어린 나의 선영이도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윤정이가 애도 키우며 직장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들겠니? 배 고프면 네가 직접 해서 먹거라.” 하시면서 내 속을 뒤집어 놓으셨다. 집 근처에 사시는 장모님께도 같은 투정을 부려 보았지만 장모님 또한 “내가 자네 밥 해주라고 윤정이를 자네에게 시집보낸 줄 아나?” 하시면서 나를 나무라셨다. 물론 맏사위인 내가 편하고 좋아하셔서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지만 나는 뭔가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을 이렇게 살다 보니 나는 늘 먹는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고 선영이도 성장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먹던 음식들을 집에서도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노량진에 있던 제법 규모가 크고 유명한 요리학원을 찾아가 등록했다. 매일 갈 수는 없었지만 퇴근 후 제법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  당시 요리학원에는 요리를 배우려는 남자는 없었다. 십여 명의 예비신부나 요리를 잘 못하는 젊은 주부들 틈에서 주눅 들지 않고 열심히 배웠고 내가 요리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멀쩡한 젊은이가 요리 배우러 다니는 것이 특이했는지 선생님들 사이에 회자가 되었고 급기야 원장님도 알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하시고 이름이 꽤 알려졌던 원장님은 나를 원장실로 부르셨다. 그리고는 직업은 있냐, 결혼은 했냐, 그런데 왜 학원에 와서 요리를 배우느냐 꼬치꼬치 물어보셨다. 나는 약간의 과장을 더하여 나의 안타까운 처지를 말씀드렸다. 원장님께서는 요즘 세상이 말세가 되려는지 젊은 새댁들이 요리도 못 하고 남편들 어려운 줄 모른다는 성토와 함께 나의 처지를 매우 안타까워해 주셨다. 원장님은 어머니나 장모님으로부터도 들어보지 못한 위로를 해 주셨다. 원장님의 격려 때문인지 그날 나는 원장님이 나의 어머니나 장모님보다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끔 TV를 통해 그분을 뵐 때면 내 어머니를 뵙는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학원을 통해 요리의 기초를 닦은 덕분에 나의 음식 솜씨는 나날이 좋아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서 먹였더니 이제는 ‘요리 잘하는 우리 아빠’가 되어 있었다.  


내가 밥을 해주면 늘 맛있다며 잘 먹어주던 큰 딸 선영이는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가 버렸다. 여전히 잘 먹지도 고마워하지도 않는 아내와 가끔 맛있게 먹어주고 가끔 고맙다고 해주는 작은 딸의 밥을 챙겨가며 지금 나는 그럭저럭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얼마 전에 회사를 그만두고 돌이켜보니 나는 평생 밥을 벌어야 했고 밥을 지어야 했다. 밥이라는 것이 먹고사는 일이기도 했지만, 밥벌이에 지쳐 밥도 못해 먹는 아이러니한 현실도 있었다. 밥은 내게 온통 삶이었다.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 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어 먹이던 그 시간들이 나의 밥(삶)이었다. 내가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함께 먹고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세월은 내 아내와 두 딸을 위한 배려이자 사랑이었다. 또한 그 밥은 나의 보람이었고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오래전 요리학원에 등록하고 열심히 배워 우리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준 것 또한 내가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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