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예기치 않은 순간의 차갑고 잔인한 미소


비가 내려. 봄비라는 이름을 지닌 차가운 비가

하늘에서 땅으로, 빨간 캐노피 위로, 화분에 갇힌 고무나무 초록 잎 위로, 자동차 지붕 위로, 차갑게 식은 아스팔트 위로 투둑투둑.

도심에 내리는 이 비는 봄비라는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차가워서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따사로운 햇살 비춘 며칠 동안 마음 급히 꽃봉오리 터뜨린 벚꽃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연약한 분홍잎들을 모조리 떨궈내니까.


기다리란 내 경고를 무시한 건 너희야.
차라리 그 자린 짙은 초록빛 잎사귀에 어울려.


그나마 쌤통이다 생각이 드는 건 아스팔트 위에 웅덩이를 만든 비들이야. 퇴근길을 서두르는 차바퀴에 무자비하게 흩어져 버리니까.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흩어져 버리는 봄비는 차라리 고맙네.


생각해 보면 당신이랑은 비에 관한 추억이 없어.

우린 비 오는 날 함께 했던 적이 없으니까.

각자 자기 만의 방에서 비긋기를 했을 뿐.

그때 당신이 나를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근데 난 지금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

어쩐지 차바퀴에 흩어지는 비가 당신 살결같이 차갑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차가운 살결이 그리운 걸까? 아니면 당신의 차가운 웃음이 그리운 걸까?


내가 잊은 고대의 어느 시간 속에서, 우린 비 오는 날에 함께였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몰라. 너무나도 차가워서, 봄비면서도 잔인하게, 그래서 내가 당신의 웃음을 차갑게 기억하는지도.


당신은 그렇지.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도 문득 눈길을 주다 보면

초여름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이 금빛으로 빛나는 사람.

당신이 이야기를 할 때면 시간이 멈춘 듯 느릿느릿 흘러가.


어느 날엔가 당신이 내게 물었어. 감정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나는 잠시 눈알을 굴리고 적당한 말들을 찾아냈지.

내가 느낀 사물과 사물, 사람, 공간, 시간, 냄새, 온도, 계절...

아,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가만히 혼자 앉아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당장에 당신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랐어. 하지만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지. 나를 당신에게 알릴 수 있는 가장 멋진 질문을 당신이 방금 던졌으니까. 나는 당신이 던진 미끼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설사 그 미끼를 입에 문 순간, 미끼에 가려진 날카로운 낚시 바늘에 내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수가 있어도. 나는 허둥지둥 갖가지 제스처를 보이며 내 마음과 머릿속 생각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어. 입안에 정리되지 않은 너무나도 많은 말들이 있었어. 그 말들이 앞다투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엉뚱한 단어가 나오고 발음도 씹혀서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점점 붉어졌지. 제발, 나에게 시간을 주세요. 나는 속으로 외쳤어. 당신에게 나를 보일 멋진 글을 써올 테니, 그동안에만 이라도 나를 기다려줘요. 엉뚱한 말을 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이 내 말에 흥미를 보이는 모습을 보이자 나는 흥분되기 시작했어. 당신도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생각에. 당신의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침착한 척 설명을 이어나가려고 했지. 그런데 아주 잠깐 사이, 찰나라고 할 수도 없는 아주 짧은 순간, 당신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어. 잔혹함에 가까울 정도로 적대적이고 유리같이 냉정한 눈빛이었지. 내가 당신의 그런 시선을 받을 만큼 무언가 잘못한 걸까. 그때였어. 당신의 차가운 웃음음 본 게. 당신은 나에게 따뜻한 카푸치노를 건네며 말했어.


여기 좀 추운 것 같은데. 조금 따뜻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



당신은 정말로 추운 걸까? 아니면 내 말이 지루해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하는 말일까? 자리를 옮기는 잠깐 사이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어. 당신이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고, 내 어깨를 감싸고 차가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 우리 뒤로 산안개에 둘러싸인 단풍잎들이 더 깊게 물들어갔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지. 그 순간에 내가 가진 갖가지 의문들과 깨진 유리조각 같은 날카로운 불안감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차에 탄 당신이 내게 계속 얘기해 달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거든. 당신이 계속 얘기해 달라고 말한 것만으로 됐다고.


당신이 내게 말했어. 차 안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 요새 모으고 있다는 음반들, 틈만 나면 들여다본다는 [Le Tour de France] 잡지에 대해서. 그때, 문득, 당신의 모습이 그랬어. 초여름 바람같이 금빛, 시간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순간. 산 안개마저도 멈추어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지. 손에 들고 있던 따뜻했던 카푸치노가 점점 식어가고, 별들이 우리를 중심으로 회전했어. 별들이 있었는지, 당신을 바라보는 내 눈이 별이 되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


당신은 그때 왜 그토록 잔혹한 시선을 보냈던 걸까?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왜 그토록 차가운 웃음을 보였던 걸까?


그 덕분에 나는 따사로워야 할 이 봄에 차갑게 내리는 봄비를 보며 당신을 떠올려.


기다리란 내 경고를 무시한 건 너야.
차라리 그 자린 짙은 초록빛 잎사귀에 어울려.


나는 무얼 기다려야 했던 걸까.

나는 당신의 초록빛 잎사귀가 될 수 없었던 걸까.


퇴근길을 서두르는 차바퀴에 무자비하게 흩어져 버리는 빗소리가 고마운 날이야.

회색빛 하늘마저 낮고 차가운, 내가 사랑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