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을 떠보니 아모는 눈밭 위에 누워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얼음보다도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어요.
손가락을 움직이고 싶지만 무거운 돌이 누르기라도 하듯 꼼짝을 못합니다.
아모는 그것이 눈이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 알았습니다.
<2>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3>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굴려봅니다.
<4>
하얀 눈밭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5>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아모는 분명 자기 방에 있었습니다.
방에는 몇 달 동안 빨지 않아 쿰쿰한 냄새가 나는 낡은 이부자리와
과자 봉지, 고장 나 버린 난로,
전날 밤의 컵라면 용기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습니다.
<6>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텔레비전을 봅니다.
뭐가 불만인지 할머니는 항상 혀를 끌끌 찹니다.
평생을 입었을 것 같은 후줄근한 몸빼 바지와
품이 하나도 남지 않은 털 누비 조끼를 걸친 모습으로 텔레비전만 봅니다.
<7>
할머니가 웃는 날에는,
손에 통장을 들고 있습니다.
그 날은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시는 날이지요.
<8>
아모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았습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는데,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비치는 소나무 숲이 눈에 들어옵니다.
<9>
아모는 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는 다시 고개를 천천히 돌려봅니다.
‘이대로 누워 있다가는 얼어 죽을지도 몰라.’ 아모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문득 옆구리 한쪽이 터져서 솜뭉치가 튀어나온 인형이 생각납니다.
<10>
아모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입니다.
잠잘 때마다 곁에 두고 튀어나온 솜뭉치를 넣어주곤 했습니다.
다음 날 보면 솜뭉치는 다시 튀어나왔지만,
아모는 잠잘 때마다 솜뭉치 넣어주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못난이 난쟁이 인형입니다.
<11>
흩날리는 눈송이가 아모의 얼굴 위로 천천히 떨어집니다.
<12>
“이대로 누워 있다가는 얼어 죽을지도 몰라.”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아모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온몸이 산산조각 날 것처럼 아팠습니다.
<11>
아모는 간신히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커다랗고 까만 두 눈이 아모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아모는 또다시 생각했습니다.
<12>
“날 따라와.”
까만 눈동자가 말을 합니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까만 눈동자에서
말이 흘러나옵니다.
‘넌 누구야?’
아모는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을 하려는 순간 온몸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숨이 턱 막히면서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13>
“정신 차려! 넘어졌다가는 산산조각 나고 말 거야!”
‘산산조각?’ 아모는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까만 눈동자가 앞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다시 말했습니다.
“말을 아끼는 게 좋아.”
아모는 까만 눈동자의 말대로 입을 꾹 다물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습니다.
<14>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하얀 천을 드리운 것처럼 흐릿해 보입니다.
하지만 까만 눈동자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어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보였던 짙은 초록빛 소나무 숲도 선명합니다.
그 둘을 빼고는 모든 것이 희미했어요.
까만 눈동자를 한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15>
“그건 내가 전부 가져갈게.”
까만 눈동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아모는 무슨 말인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네가 보았던 것들 말이야. 그건 내가 전부 가져갈게.”
까만 눈동자가 아모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말했습니다.
<16>
‘그동안 내가 보았던 것들을 전부 가져간다고?’
내가 보았던 것들….
아모는 생각했습니다.
문득 지난밤의 라면 용기가 떠올랐습니다.
‘바닥에 눌어붙은 라면 가닥이며 수프 가루,
여기저기 얼룩이 묻고 쾌쾌한 냄새나는 이불을 가져가겠다고?
손바닥 한 뼘도 안될 만큼 작은 방에 쌓여있는 고철더미며 폐지들을?
쓰레기 국물과 진흙이 뒤엉킨 내 더럽고 해진 운동화를 가져가겠다고?’
<17>
운동화에 생각이 미치자 아모는 자기 발을 내려다봅니다.
발에는 운동화가 그대로 있습니다.
진흙과 쓰레기 국물이 묻은 채로 그 자리에 있지요.
그런데 왼발은 벌거숭이입니다.
왼발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하얀 눈밭을 빨갛게 물들였습니다.
<18>
‘어디로 가는 거야?’ 다급해진 아모가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왠지 까만 눈동자가 자기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넌 저쪽으로 갈 거야.”
까만 눈동자가 흐릿한 곳을 눈으로 가리켰습니다.
‘싫어! 거긴 너무 춥고 무서워! 난 따뜻한 숲으로 갈 거야!’ 아모가 외쳤어요.
<19>
“그건 안 돼.” 까만 눈동자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모는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곳을 흘끗 쳐다보았습니다.
무언가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인데도 어쩐지 춥고 무서울 것 같았습니다.
<20>
‘무서워!’
까만 눈동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난 따뜻한 숲으로 가고 싶어!’ 아모가 한 번 더 소리쳤지요.
“넌 저쪽으로 갈 거야.” 까만 눈동자는 아모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21>
아모는 까만 눈동자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왼발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습니다.
까만 눈동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장서 갔습니다.
짙은 초록빛 숲이 아모의 등 뒤로 희미해져 갔습니다.
“저쪽으로 가면 발을 나을 수 있을 거야.”
이윽고 까만 눈동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아모는 아무리 가도 희미한 곳에 닿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갔는데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것 같았습니다.
아모는 점점 더 무서워졌어요.
<22>
삑! 삑!
별안간 희미한 곳에서 고막을 찌를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디서 찾았는지 까만 눈동자가 아모의 운동화를 휙 던졌습니다.
아모가 왼발에 신고 있던 해진 운동화입니다.
“어서 저 운동화를 넘어가!”
까만 눈동자가 소리쳤어요. 전보다 더 크게 뜬 까만 눈과
입이 있을 법한 자리에 난 큰 구멍으로 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아모는 온몸이 얼어붙을 것처럼 소름이 끼쳤습니다.
‘시… 싫어! 무서워!’
“어서 저 운동화를 넘어가!” 까만 눈동자가 또다시 소리쳤습니다.
<23>
‘저기에 뭐가 있는데!’
온몸이 산산조각 날 것 같았지만 아모는 있는 힘껏 외쳤습니다.
“너!”
까만 눈동자가 대답했습니다.
<24>
흩날리는 눈송이가 아모의 얼굴 위로 천천히 떨어집니다.
<25>
눈을 떠보니 아모는 침대 위에 누워있어요.
주변이 온통 하얀색입니다.
아모는 눈을 굴려봅니다.
<26>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27>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굴려봅니다.
그리고 문득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꼭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해진 운동화입니다.
왼발에 신고 있어야 할 해진 운동화를 꼭 쥐고 있습니다.
<28>
하얀 옷을 입은 간호사 둘이 아모 주변을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립니다.
삑, 삑, 삑, 삑
<29>
“……지난 5월 6일 새벽 3시 30분에 피해자 A양이 경상도 양산의 한 야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A양은 1미터 정도 깊이의 땅 속에 파묻혀 있었으며 의식불명 상태였습니다. 땅 속에 생매장된 A양을 구조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A양이 손에 꼭 쥐고 있던 운동화 때문이었습니다. 구조된 A양의 몸에서는 친부 박 모씨로부터 수년간 당해온 학대의 흔적과 사건 당일 입은 것 같은 발등과 팔뚝의 자상이 있었습니다. 친부인 박 모씨는 범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집에 불을 질렀으며 이웃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박 모씨는 자신이 딸을 살해한 뒤 암매장했다는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경찰은 박 모씨와 함께 범행에 가담한 박 씨의 친모 이 씨를 구속 기소하였습니다. A양은 현재 병원에서……”
<30>
묵직하면서도 목구멍까지 차오를 것 같은 잠이 아모를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겼습니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 사이로 불에 탄 폐허가 어른거렸습니다.
온 세상이 끄물끄물 희미해져 가는 순간,
잿빛으로 변한 폐허 사이로 불에 타 녹아내린 까만 눈과 입을 한
난쟁이 인형이 보였습니다.
- ⓒ 2020 아프리카와 고양이 글
- ⓒ 2020 최민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