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이 안 되는 당신과 누군지 모르는 내가 만나서

우리는 사랑을 했어요



당신이 떠올랐어요. 나는 분명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순서상 그 일을 하는 게 맞는데, 당신을 찾고 있네요. 우습죠? 딱히 당신에게 해야 할 이야기도 함께 하고 싶은 일도 없는데...

그래요, 당신은 딱 그래요. 당신과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요. 그런데도 함께 있고 싶어요. 분명 큐피드가 잘못된 화살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쏘아서일 거예요. 그렇지 않고는 설명이 되지 않아요. 아니, 당신과 하는 모든 일들이 설명이 안 돼요. 당신은 나에게 그런 존재예요. 머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존재. 머리마저도 자기 논리로 집어삼킨 존재.


당신 지금 어디에 있나요?

아침마다 읽던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지침들이 어느 순간 고루하고 답답한 족쇄같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분명 보름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찾아 읽던 말들이었죠.

왜일까요? 왜 사람은 한결같을 수 없을까요? 한순간의 변심으로 생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생은 또 다른 순간의 결정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들어서게 되죠. 그렇게 꺾이고 꺾인 결정들은 나를 내가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닌 이상, 당신처럼 설명이 안 돼요. 내가 당신을 그리는 것처럼.

내가 아닌 존재라고 말했어요, 사실 내가 나였던 적이 있는지 그것도 명확하지 않아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니까요.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다가도 그런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결정을 해버리니, 명확하지 않은 것이 맞겠지요.

설명이 안 되는 당신과 누군지 모르는 내가 만나서, 우리는 사랑을 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진 순간을 떠올려 봐요. 난 당신에게 다른 연인들과 별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에요. 당신은 내가 누군지조차 몰랐죠 –그건 당연한 거예요- 당신에게 나는 그저, 그저 언젠가는 잊힐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한순간의 결정으로 – 그 결정을 내가 한 것인지 당신이 한 것인지 그건 도무지 모르겠어요 – 우린 서로를 알아봤죠.


내 웃음소리가 당신을 돌아보게 했나요?

눈을 굴리며 조용히 해야 할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빠뜨리는 것 없이 얘기하려던 내 입술이 눈에 띄었나요?

나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당신을 설레게 했나요?

나는 땅굴 속에 숨어 사는 난쟁이 같아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엿들으면서 이리저리 고개를 빼꼼 내밀고 눈알을 굴리지만 입은 언제나 꾹 다물고 있어요.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어느 찰나에 내 입에서는 꿀 같은 말들이 흘러나와요. 당신을 사랑하게 된 그 순간에요. 나는 사력을 다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려고 노력해요. 당신을 인정하는 말들, 당신을 열렬하게 부정하는 말들. 나의 말은, 나의 말은, 아, 나의 말은 허공 속에 흩어져 버리는 햇살처럼 쏟아져 나오죠. 사라져 버릴 말들, 잊힐 마음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진 순간을 떠올려 봐요. 당신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돌아봤죠. 나는 서늘한 당신의 눈빛에 흠칫 놀랐어요. 두려웠어요.


당신의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당신을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걸까요? 당신은 아무 말도 없었죠. 당신은 지금도 아무 말도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서늘한 눈빛, 나는 그 눈빛에 매달려요. 그 서늘함 뒤에 있는 안식을 나는 무의식적으로, 온몸으로 느끼죠. 그 안식을, 당신의 안식을.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어요. 당신의 눈빛은 내가 몸을 던져 당신에게 안기고 싶게 만들어요. 당신의 품은 분명 아주 넓고 따뜻하고 아늑해요. 나는 그 넓은 품에 안겨 어둠 속에 묻혀버리죠. 숨을 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늪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나는 당신 안에 스며들어요. 애초에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내가 당신에게 스며드는 일이, 그건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 어쩌면 옳은 일. 서서히, 조용히, 영원 속에. 무덤을 품은 당신의 눈빛, 요람을 품은 당신의 가슴.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당신을 알아봤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두려워도. 하지만 너무 빨리 나를 안지는 마세요. 당신이 잊은 수많은 연인들처럼 그렇게 천천히 나를 안아주세요. 당신이 아무리 모습을 바꾸고 마음을 바꿔도 나는 당신을 알아볼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수많은 순간의 결정들 속에 나의 모습이 얼마나 바뀌든, 나는 결국 당신 품에 안길 거예요. 그것만은 변함없는 진실, 한결같은 결말.


당신과 나 사이, 내가 만나게 될 수많은 인생들, 순간의 결정으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눈물 흘리게 될 수많은 존재들을 내 몸에 새긴 채,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나를 통해 내 안에 스며든 수많은 세계를 품어요.


층을 달리 한 시공간이여, 모습을 교묘하게 감춘 그대여.


딱히 당신에게 해야 할 이야기도 함께 하고 싶은 일도 없는 계절, 땅으로 돌아갈 것들을 향해 꽃을 피운 때죽나무 아래서 잠깐 동안만이라도 그. 냥, 나와 함께 있어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