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

-평행선



“당신이 언젠가는 나에게 그 감정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당신이 말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내 감정을 인정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 찰나였습니다. 나는 하마터면 당신에게 나의 것들을 내보일 뻔했습니다. 당신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그렇게 말할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나는 당황스러운 한편 속으로 생각했어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는 날이면, 나와 당신이 사는 세계가 뒤섞여 버릴 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사는 세계와 당신이 사는 세계는 평행선을 달려야 해요. 지금처럼 이렇게 가끔 마주치는 일은 있겠지만 절대로 서로 뒤엉키는 일은 없어야 해요. 우리는 이미 각자의 평행선 위에 너무나도 많은 마디를 이었으니까요. 두 평행선이 엉키는 날에는 그 마디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갈 거예요. 출혈도 크고 아픔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그러니 우리의 평행선은 지금처럼 이렇게 가끔 마주치다가 다시 원래의 궤도로 돌아가는 걸로 해요.’

나는 당신을 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거절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음 한편이 저항하는 한편 저려왔습니다. 무엇에 대한 저항인지, 왜 저린 것인지 나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눈 후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변화는 내 안에서 일어난 것이니까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연기가 가득 들어찬 주방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나는 연기가 가득 찬 주방 안에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나 혼자 뿐이었습니다. 연기는 오랜 세월 아주 조금씩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 연기에 내성이 생기다 보니 프라이팬이 새까맣게 탄 줄도 몰랐습니다. 그저 가스레인지를 끄면 프라이팬도 주방도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연기가, 냄새가 주방 구석구석 스며든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당신은 그 연기를 조금씩 거두어주었습니다. 내 주방에 조그만 창문을 내주는 것으로요. 딱 내 주방에 맞는 크기의 창문입니다. 실체가 있는 투명한 바람이 들어왔고 연기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주를 담은 묵직한 바람입니다. 이제 주방에는 약간의 연기와 짙게 밴 연기 냄새만이 남아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딱 그만큼입니다. 남은 연기를 거두고 연기냄새를 빼는 건 나의 몫입니다.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의 평행선은 뒤엉키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 주방에 내 준 작은 창문에 건배를!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우주에 미소를!


나는 당신에게 매혹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친절하고 따뜻한 말들로 나를 흔들지 마세요. 나는 그런 말들을 모른답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말들을 나는 살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들어 본 적 없는 말들을 동경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마치 수련하듯 그런 말들을 해왔지만 정작 스스로는 그런 말들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를 동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그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대신 나와 이야기를 나눠요. 나의 슬픔에 대해. 그리고 당신에 대해 조금씩. 내가 당신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딱 그만큼만.


그를 사랑했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를 위해 작은 생선 한 토막을 굽고 갓 지은 쌀밥에 맑은 된장국, 싱그러운 오이무침과 매콤한 무생채로 상차림을 하고 둘이 마주 앉아 행복하게 밥을 먹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영혼을 나누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리가 만든 우주를 공유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의 평행선은 서로 멀어져 갔습니다. 사다리처럼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뻗어 나갔습니다. 그는 나를 보며 웃지만 그 웃음은 나의 마음에 닿지 않고, 나의 눈빛은 그의 마음을 뚫고 사라져 버립니다. 나의 말은 그에게 해변에 널린 자갈밭을 시끄럽게 훑고 지나가는 파도에 지나지 않고 그의 말은 나에게 수면 위에 반사되어 사라지는 빛과 같습니다. 소란하고 눈부시고 간지럽고 따스한 우리의 말들은 그 어디에도 닿지를 않습니다. 서로 파동을 일으키며 멀어져 갑니다. 각자의 영원을 향해. 각자의 허무를 향해.


나의 시작은 슬픔이었습니다.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 뒤로 경험했고 보았고, 다시 느꼈습니다. 비로소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슬픔은 이미 나에게 각인되었습니다. 나는 부모님이 행복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부모님은 나를 행복하게 키우지 못했습니다. 행복하게 자라지 못한 나는 행복을 책을 통해 읽었습니다. 나는 행복을 익혔고, 행복한 – 행복할 거라 짐작이 되는 – 사람들을 보며 행복의 모습을 짐작했습니다. 나는 행복을 동경했고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그에게 입혔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각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더군요. 각인된 자들만이 그 감정을 고스란히 타인에게 줄 수 있다는 걸 나는 알았습니다. 나는 행복을 흉내 낼 줄만 알았지,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알지 못했기에 어떻게 표현하고 전해야 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동그란 파동을 그리며 멀리 사라져 갑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각인된 감정을 튕겨내는 존재들입니다. 나는 그것이 언제나 슬펐습니다. 안을 수 없음. 담을 수 없음이. 나눌 수 없음이. 함께 슬퍼할 수 없음이. 함께 위로할 수 없음이. 함께 사랑할 수 없음이. 사라져 가는 것들이. 속절없이.


그런데 당신이 나의 각인된 감정을 보여주라고 하는군요. 나는 당신이 결국 떠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으니까요. 평행선. 당신은 나에게 나의 감정을 보여주라고 했지만, 아마도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평행선으로 달리는 당신에게 나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건,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두 개의 달이 같은 하늘을 공유할 수 없듯, 두 개의 시간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만 존재할 수 있듯 당신과 나도 그렇습니다. 그래야만 슬프지가 않습니다. 당신과의 기억마저 슬픔이 된다면, 나는 말할 수 없이 내가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나의 주방에 창문을 내어주어 감사합니다.


우주를 담은 바람에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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