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늙어서 지난날을 추억하는 것일 뿐이다. 결혼은 상냥한 사람하고 하거라.
- 영화 'About Time' 중에서
"엄마, 저 오빤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어릴 적 엄마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마을 어귀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땐 어스름하게 해가 떨어지던 날이었고, 마을에는 시장에서 나물거리를 팔고 남은 것을 가지고 오는 할머니가 계셨다. 버스정류장에는 할머니의 커다란 소쿠리를 들어주는 고등학생 오빠가 있었다. 동네어르신들은 오빠가 인사성도 밝고, 어질게 착한 사람이라고 늘 칭찬 일색이었다. 공부도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갈 거라고 했다.
오빠는 학교가 파하고 나면 친구들과 놀러 가지 않고, 꼭 막차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등에 멘 책가방은 내려놓지도 않은 채 그렇게 할머니를 기다렸다. 엄마는 오빠의 부모님이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지만, 할머니를 끔찍이 아끼는 효자라고.
그래서 어린 나이였지만 맘씨 예쁜 오빠가 좋아서 그렇게도 쫓아다녔나 보다.
내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오빠가 있는 정류장을 몰래 힐끔힐끔 쳐다봤다. 오빠는 그때마다 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하나씩 꺼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학교 근처 문방구에서 나를 주려고 일부러 사탕을 하나씩 사 왔단다. 그 말에 어찌나 감동의 물결이 일던지. 목소리도, 말씨도 어쩌면 봄날의 상냥한 햇살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어느 날은 그것 때문에 눈물이 젖은 눈으로 엄마를 졸랐다.
"엄마! 나 커서 오빠한테 시집 갈래!"
그럼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오빠가 멋쩍은 듯 웃었다. 엄마가 웃으면서, 쪼끄만 게 벌써부터 시집 얘기야! 하셨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그 오빠를 좋아했을까.
학교가 파하고 난 길, 노을이 지는 텅 빈 정류장, 손에 쥐어준 작은 오렌지 맛 사탕. 그 모든 것에는 늘 사랑과 기다림이 있었다. 상냥하다는 것은 그렇다. 모든 이들에게 예쁘고 멋지게 보이는 것보다, 내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이는 정성이 더 따뜻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그 날 오빠가 아무도 없는 쓸쓸한 정류장에서 할머니를 기다렸던 것은, 내 사람을 사랑하는 진심에서 나오는 모습이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 특히 내 사람에게 상냥한 사람. 나는 어쩌면 그 노란 노을 볕 아래, 오빠의 따뜻한 모습을 보고 반했는지도 모르겠다.
인연이라는 것은 그렇다.
노을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날 정류장에서 앉아 할머니를 기다리던 오빠의 옆모습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