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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04. 2022

우리 마주치게 된다면,
부디 모른 척 지나가 주세요

잘 지냈냐고 묻지 말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 말고
아프지 않았냐고 걱정하지 말고
사랑했었다고 통보하지 마

당신의 말,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모든 것 없이도
나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

부디 텅 빈 안부는 묻지 말아 줘

-책 <나의 아날로그에게> 중에서


 바래진 추억 속에 사는 것만큼 잔인한 것도 없을 겁니다. 당신 없이는 죽어도 못 살 것 같던 날들이, 어느 순간 끝이 났습니다. 헤어지자는 인사 없이 천천히 멀어졌던가요? 아니면, 그래도 마지막으로 깊은 포옹을 했던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해진 글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습관처럼 내뱉던 말이 있습니다. 혹여 우리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우리가 함께한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자고. 영원히 간직하자고 말입니다. 어느 타임슬립 멜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당신에게 뱉어댔죠. 그런데 그 말이 현실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헤어진 지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는 이따금 그때의 우리를 회상하곤 합니다.

 매일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당신의 얼굴은 이제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가끔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보게 되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하루가 고단하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젠 다른 사람을 만났을지. 당신의 가슴에 내가 지워졌다고 해도 서운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누굴 만나든 나완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은데, 어쩌다 당신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정말 괜찮을 수 있을까요? 괜찮지 않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당신을 바라보게 될까요.

 당신의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당신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내 가슴속 당신은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이 되어서는 나와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조그마한 캔커피 하나를 들고서 동네를 걷기도 했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기도 했고, 밤을 새워 함께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참, 우린 순수하고 풋풋했습니다. 구멍 난 양말을 보며 깔깔 웃을 수 있던, 열심히 준비한 시험에 낙방해 눈물을 떨어뜨릴 때 진심으로 위로해줄 수 있던. 배고픈 시절의 우린, 서로에게 애정 어린 뜨거운 마음으로 안아 주었습니다.

 다시 당신을 만난다거나, 당신이 무척 보고 싶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따금 어떤 날에 당신이 불쑥 찾아오곤 했습니다. 마치 이 순간을 잊지 말자고 내뱉은 말이 그 약속을 지키려는 듯이, 최선을 다해 현재에 부딪힌 것만 같습니다. 지난날 영혼의 투쟁이 아직까지도 당신을 기억하게 만드나 봅니다. 그때 함께 계절 냄새를 맡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중에 나이 지긋한 어른이 되었을 때의 우리를 상상하며 버틴 시간들. 그 시절의 우리가 가끔 생각납니다.

 어쩌다 우리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요. 만약 우리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부디 모른 척 지나가 주세요. 세월이 진득하게 흐른 만큼, 나도 당신도 많이 변했을 테죠. 지난날 우리의 순수했던 사랑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세월에 무뎌진 각자의 가치관과 생각들로, 뜨거웠던 추억을 덮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각자의 시간이라는 교차로에서 잠시 머물렀을 뿐이라고.

 당신을 만나는 동안,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때의 깨끗하고 어여쁜 미소를, 살면서 가끔씩 꺼내보고 싶습니다. 당신 없이 사는 동안, 내가 천천히 늙어가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바래져가는 그 추억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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