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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02. 2022

우리의 사계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등지고 선 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바다 위에 뜬 섬 너머로 지는 해는 평소보다 유난히 뜨겁게 보였다. 그 시간이면 해와 달을 함께 볼 수 있었다. 미농지에 덧대어 그린 배경처럼 같은 하늘에 해는 녹아내렸고, 달은 흐릿하게 보였다. 식어가는 해와 하얀 달과 넉넉한 하늘과 포근한 바람이 함께하는 시간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해를 등진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왠지 지금이라면, 네 마음과는 무관하게 나의 고백이 받아들여질 것만 같았다. 그것이 너에 대한 잘못이었든, 사랑이었든, 혹은 어떤 이별이었든. 고백에 따른 응답 자체가 순조롭게 흘러갈 것만 같은, 확신에 찬 분위기가 말이다.

 붉은 노을빛에 어렴풋이 비친 네 입술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살짝 올라간 긴장과 설렘은, 이미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지 전부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다. 사랑을 먼저 말하기에는 너무 가벼울 것 같았고, 진심을 먼저 말하기에는 너무 구구절절해 보일 것 같았다. 차라리 마음을 꺼내어 보여줄 수 있다면 어땠을까. 그럼 너는 웃으며 내 마음을 안아 줄까.

 사랑에도 질량이 있다면, 나는 어느 정도의 부피일까. 너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는 것처럼 철렁거렸다. 어쩔 때는 기운 찬 파도가 불러일으킨 해일처럼 복잡하기도 했다. 마음은 시시때때로 안절부절못했다. 어쩌다 너와 두 눈이 마주 칠 때면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랐다. 능청스럽게 아닌 척 연기하는 편이 나을까.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지 못하겠다. 네 앞에서는 태연하게 연기할 수 없었다. 단지 내 마음을 들켜버릴까 염려스러운 게 아니었다. 계속 널 보고 있으면, 내 심장이 미어지듯 아팠기 때문이었다.

 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픈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너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지난밤, 잠 못 이루며 내내 생각했다. 널 보면 무슨 말을 먼저 할지, 어떤 타이밍에 고백할지, 그리고 내 진심을 들었을 때 네 표정은 어떨지. 하지만 막상 너를 마주하고 보니,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해를 등진 너의 보이지 않는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늘진 얼굴에서도 너의 따뜻한 눈빛이 보였다. 예전 같으면 피했을 두 눈빛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가슴이 아프고, 아리고, 쿵쾅거렸다. 그래도 계속, 계속, 너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그저, 말없이.

 내 눈빛을 읽은 네 눈빛도 가만히 나에게 붙박여 있다. 그렇게 천천히 얼굴이 가까워졌다. 다가가는 나를 보고 잠깐 멈칫거리던 너도,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늘 상상하기만 했던 네 입술이 내 입술에 포개어졌다. 미끌거리고 따뜻한 감촉이 입 안에 가득 맴돌았다. 우리를 둘러싼 배경이 몇 배는 더 풍성해지는 기분이었다. 포근한 노을빛과 하얗게 빛나는 달빛과 잔물결이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바다와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맡을 수 없는 어느 겨울의 냄새. 너의 살 냄새와 샴푸 냄새.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셔츠 구겨지는 소리 그리고 점점 더 거칠어지는 네 숨소리.

 지금 이 순간, 나는 우리가 어느 계절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입맞춤은 포근한 봄 향기였다가 뜨거운 여름이기도 했고, 따뜻한 가을이기도 했다가 순수한 겨울이기도 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그랬다. 파르르 떨리는 네 속눈썹을 느끼며, 너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어느 계절이면 어떤가. 나는 오늘을, 너의 계절이라고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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