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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07. 2022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진심은 공든 탑 위에 위태롭게 올려져 있었다.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했던 마음들이 쌓인 탑이었다. 수많은 밤동안 조심스럽게 쌓아온 탑은 조금도 견고하지 않았다. 살랑 불어온 바람에도 금세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빌었다. 부디, 너에게 흔들리지 말자고.

 너는 나를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는 바람이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봄날처럼 차분했다가, 또 어떤 날은 태풍이 휘몰아치듯 네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네가 그리운 날, 나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최대한 네가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무너지는 내 마음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본능적인 감정들을 몇 번이고 누르고 또 눌렀다. 이따금 닿는 너의 손끝과 네 머리칼과 네 품에서 나는 비누 향이 내 가슴을 더 벅차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모든 걸 무너뜨리고, 네 손을 잡아버리고만 싶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너를 안고만 싶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입김 사이로 불안하지만 설레는 네 두 눈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널 껴안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처럼 불어온 너는, 바람처럼 내 곁을 떠날 것을 알았다. 내가 오랜 밤동안 공들여 탑을 쌓아온 이유였다. 너는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볼 것이었고, 발그레해진 뺨에 갈 곳 잃은 시선은 자꾸만 나를 피할 것이었고, 그렇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할 것이었다. 우린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 어쩌면 넌 내가 다가오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그리고는 끝내 너는 내게서 도망갈 것을 알았다. 다가오길 바라면서, 다가오지 않길 바라는, 그런 아이러니한 마음.

 저녁노을이 저물던 때, 내 마음도 길 잃은 시간 위에 서 있었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 사이에 우리는 함께 있었다. 여기서 밤이 깊어진다면 나는 언제든 네 손을 붙잡고 달아날 수 있었다. 밤은 실수를 눈감아 줄 테니까. 그러나 너는 밤의 성질을 아주 잘 알았다. 밤이 깊어지면 우리는 발가벗겨진 진심을 드러내 보일 거라는 걸.

 ─ 이제 집에 가야겠다.

 해가 지기도 전에 너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통보했다.

 ─ 그래, 그러자.

 그럼 나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 너와 더 있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우리의 마음이 기계라면, 서로에게 흔들리지 않을  있을까. 나는 가끔, 밤에 벌어질 실수에 대해 떠올리곤 한다. 만약 내가  손을 붙잡는다면,  가녀린 몸을 껴안는다면, 가지 마라고 말한다면 너는 나의 선택을 받아들여 줄까. 세상이 눈을 감는 어둑한 밤에, 너는  손을 잡고 함께 도망가줄까. 사실  불안한 마음을 무너뜨릴  있는 방법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네게 힘겹게 매달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너를 되도록 오래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뜨거운 마음을 감추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관계는 유효했다. 너라는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초인적인 힘으로 탑을 지키는 것만이, 만남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애매한 관계 속에서도, 네가 내 마음을 눈치채고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침묵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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