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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13. 2022

그저 널 사랑했을 뿐인데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그 바람에는 어느 날 고요하게 웃던 네 얼굴이 보였다. 수줍게 웃으면서도 커다란 두 눈은 나에게 고정하고 있던. 그 모습이 어여뻐서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았던 나.

 바라보기만 해도 속절없이 흐르던 시간은, 어떻게 해도 간극을 좁힐 수 없었다. 이 겨울이 몇 백 년이나 지속되기를 바랐다. 우리가 속했던 계절의 시공간은 그토록이나 짧은 것이었다. 추운 겨울 코 끝이 빨개지도록 마주하고 있던 얼굴은, 남들보다 조금 빠른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 거리의 불빛에 부서지는 눈동자, 눈가로 떨어지던 눈물, 차가운 공기 사이로 풍기던 비누향기, 그리고 따뜻한 품. 그날의 잔상들이 필름처럼 흩어져 여러 날동안 마음속을 나뒹굴었다. 어디로 흩어졌는 줄 모르게, 마음의 침대 밑에, 장롱 밑에, 서랍 구석에.

 어느 날,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네가 떠나버리는 날,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영원할 것 같던 낭만의 겨울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우리는 생명의 봄을 살아내야만 할 테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이제 더는 우리가 함께한 계절 따위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가끔,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고 떠올려보게 됐다. 일어나지도 않을 기적, 서서히 녹아가는 환상의 것들을. 오지 않을 계절을 또 한 번 생각하면, 가슴은 널 한 번 그리워했다가 처참히 찢어지곤 했다.

 언제까지 우리의 계절을 간직할 수 있을까. 조금씩 아련해지는 얼굴을 추억하면서, 슬픈 봄을 맞게 될 것이다. 너도 날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나만 이렇게 널 그리워하는 걸까, 내 인생을 이리도 무참하게 망가뜨려놓고서…. 원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연락 한 번 없는 네가 야속하고 미울 것이다.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을 네가 그립고, 또 사무칠 테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너를 잊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1년 뒤, 우리가 함께한 계절을 다시 맞았을 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아련해져 있기를. 용기보다 두려움이 더 커서, 너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기를. 너는 너의 계절을 살고, 나는 나의 계절을 살 테니까. 그게 우리를 잇지 못할 큰 사유였다.

 잠시 널 욕심냈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널 사랑했다. 그 이상의 욕심은 내게 사치였다. 어느 날 네가 좋은 사람을 만나 웃고 있을 때, 그때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잘됐다며 사심 없이 안아줄 수 있기를. 그런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올까. 아니, 지금으로서는 그런 날조차 상상하기 힘들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우리의 계절을 차츰 잊어가게 된대도, 언젠가 다시 계절의 조각을 발견할 날이 올 것이다. 언젠가 흩어져버린 마음의 침대 밑에, 장롱 밑에, 서랍 구석에. 이따금 청소하다 발견될 그 추억들을 보며, 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는 조금 더 무뎌진 마음으로, 그저 좋은 계절이었다고, 웃어넘길 수 있을까. 아니, 아니. 그런 날이 애초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머리를 젓기도 한다.

 누구를 위한 이별일까. 어쩌면 우리를 위한 이별이 아닐까. 각자의 계절을 더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더 안아주기 위해 상처만 남을 사랑을 덮어두는 것. 환절기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계절은, 서서히 변하는 온도만큼이나 천천히 태동할 테다. 그저 그렇게 믿고 싶은 것. 가슴 사무치는 그리움과 찢어지는 괴로움 사이에서도 각자의 길을 걷는 것. 나는 다만, 우리의 아픔이 조금 더 무뎌졌으면 한다. 하루빨리 시간이 흘러, 네가 날 잊어버리는 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앞에 당당히 소개하는 날. 그런 날이면 나는 괜찮을 것 같다. 차라리 네가 날 빨리 잊고, 덜 아픈 편이 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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