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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17. 2022

운명에 순응해야지, 그러기로 약속했다는 듯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모든 걸 어그러뜨렸다. 비틀린 시간에서 하루하루 고통 속에 몸무림 치면서도, 단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었다. 눈물은 때로 그 비참한 어둠에 가둬놓기도 했다. 다시는 널 만날 수 없다는 두려움과 차라리 다행이라는 또 한 편의 안도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자리, 축축하게 젖은 모래사장에 발을 딛고 서 있기란, 그 마음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운명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태초의 조물주가 이미 몇 천년 뒤의 운명까지도 예견해 놓은 것이었다면, 어쩔 수 없이 신의 계획 속에 살아야만 할 테다. 그러나 때로는 운명이라는 걸 부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오만한 생각으로 잠시 널 그리워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한다면, 너 하나만을 향해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준다면, 어쩌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매일매일 행복에 젖어 웃기도 하고, 기쁘게 울기도 하지 않을까.

 행복은 그리 쉬운 이름이 아니었다. 누군가들의 입에 쉽게 오르내릴 수 있으나, 쉽게 느낄 수 없는 나날들이기도 했다. 그런 '행복'을 감히 꿈꾸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죄악일지도 모르겠다고. 사랑에 대한 편견은 그렇게 조그맣게 불신을 낳았다. 정말 너와 함께 한다면, 이 모든 불안도 행복으로 바뀔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썰물이 지나간 자리의 모래사장에 몸을 숨긴 조개껍데기처럼 드러났다. 불신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견고해져 갔다.

 네가 날 영원히 사랑하지 못할 거란 낙담이, 차라리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언젠가 벌어질지도 모를 너의 배반과 혹은 나의 배신, 그 사이에 응집되었던 서운하고 불편하고 미지근해진 감정들. 사랑과 행복이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치유될 수 없는, 믿음과 불신이란 노력의 영역. 이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으려면, 네가 날 평생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체념을 품어야만 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고 해서 평생을 열렬히 사랑만으로 불태울 순 없을 테다. 짧고 뜨거운 여름밤에도 신의 계획에 포함될 것이라고. 그날의 뜨거웠던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영원히 변질되지 않을 추억 속 사랑만으로, 우리는 어제보다 더 찬란한 하루를 살아낼 수 있을 거라고.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단정지은 결말에 서글퍼하지 않기를. 우리는 어쩌면 더 진하고 깊게 사랑하기 위해, 이른 이별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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