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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19. 2022

우리가 우리를 모르기 전으로

 조금씩 누그러지는 삶. 감정은 그렇듯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인 줄 알았다. 외로운 계절에 피어난 꽃은, 활기찬 봄을 맞고 나면 시들해져 버리곤 했으니까. 영원히 뜨거운 마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어느 겨울 녘 눈부신 찬란함으로 더없이 아름답던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당신을 믿었지만, 내일을 믿을 수 없었다. 외로운 계절의 꽃은 언제든 시들어지고 말 테니까.

 사무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코끝에 잔잔히 부서지는 훈김을 따라 천천히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불빛을 등지고 선 얼굴에도 일렁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몇몇 사람들의 산책하는 소리, 가로수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겨울바람소리, 눈이 쏟아지기 전의 적막. 모든 배경이 아득해지고 오직 당신만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처절하게 당신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당신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그래야만 당신이 도망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야 내일도, 당신이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음 한 편에 자리 잡은 두려움이 울컥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당신 모르게 눈물을 훔쳐냈다. 저, 이제 어떡하죠? 눈물과 함께 막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에 불어넣은 우리의 사랑이 미끄러지듯 차오를 때, 내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 뛰었다. 언젠가 변해버릴 사랑에 두려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무척 기뻤다. 괴롭고 행복한 이 순간을, 언제나 기억하고 싶었다. 눈물이 흘러 턱밑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나는 계속해서 당신을 바라보고, 입술을 섞고, 뜨겁게 껴안았다. 가지 마요, 나랑 같이 있어요. 당신이 뜨겁게 속삭일 때마다, 가슴에 또 한 번 두려움이 요동쳤다. ─사랑해요─ 속으로 수없이 뱉어낸 말들을 가슴에 묻으며, 애써 당신을 껴안았다. 불안한 밤이 흐르고,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묻혔다. 그 시간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그날 우리의 눈빛을 또렷이 기억했다.

 당신과 함께하면, 늘 괴로우면서도 행복했다. 그 아픈 행복 속에서도,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아픔도 괜찮을 것이라고 되뇌었다. 시간이 흐르면 다 해결되리라는 막연한 핑계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사랑을 키웠다. 이젠 나도 나를 잘 몰랐다. 당신과 헤어져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온몸이 부서져라 껴안아야 할 것인지.

 이런 눈부신 슬픔에도 진심 어린 사랑이 있다면, 평생 오지 않을 마지막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당신의 손을 잡고 달아나도 괜찮은 걸까. 현실의 걱정들, 고민들 다 내팽개쳐버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그래도 언젠가 그런 마음도 쉽게 저버리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당신이 무척 보고 싶다고.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겁쟁이 같은 마음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 커져갔다.

  애초에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아픈 사랑도 없었을까.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거나, 죽을 것 같이 사랑하거나, 가슴 미어지게 아픈 감정 따위 알지 못하게 될까. 그래도 차라리, 모든 걸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를 모르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웃으며 당신을 마주 볼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천천히 녹아가는 눈과 허물어지는 계절의 경계와 얕아지는 겨울바람의 노래 사이에서, 천천히 당신을 묻기로 한다. 지워지지도, 잊히지도 않을. 그저 덮어놓고, 묻어둘 수밖에 없는. 어느 찬란했던 겨울, 우리의 계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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