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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20. 2022

너를 그저 덮어두어야만 한다는 건

 청명한 겨울 하늘 아래 지상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포근했다. 어쩌면 초봄이 일찍 찾아온 것만 같은 햇살. 그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오늘 날씨 참 좋다, 고 나지막이 내뱉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뒤돌아서면 추운 그늘이 지는 겨울의 햇살 밑에서, 목소리를 내뱉은 이의 해맑은 미소가 생각난다. 모든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봄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계속 우리 이렇게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가슴에 진심을 꼭꼭 눌러놓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참으로 잔인하게도, 깨끗하고 투명했다.

 우리가 영원한 이별을 약속하던 , 하루가  시간처럼 흐른 , 우리는 애써 웃고 있었다. 이따금 치밀어 오르는 불안한 두려움마저 억눌러가며, 필사적으로 우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간도, 눈빛도, 마음도 닳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삶의 끝자락에  사람들처럼, 처절한 마음들은  짧은 시간 동안 애처롭게 엉겨 붙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이, 진심이, 사랑이  하기 전까지. 우리가 애써 붙잡고 있던 운명의 끈이 풀어질 때까지.

 각자의 진심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밤에 나는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던 너의 손이 생각났다. 손끝에서 천천히 떨어지던 품과 손끝과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끝까지 놓지 못했던 너의 시선과 멀어져 가는 몸. 네가 완전히 사라지자, 포근한 줄로만 알았던 겨울이 무척이나 춥게 느껴졌다. 나는 내 손으로 애써 차가운 어깨를 쓸어내렸다. 아직 내 품에선 네 향기가 났다. 진득한 이 향기가, 오랫동안 품에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다시 네가 나에게 달려와줬으면 좋겠다. 아니, 다시 내 옆에 앉아, 그 귀여운 두 눈으로 생긋 웃어주어주기만 해도 좋겠다. 아니, 아니…. 아, 모르겠다. 이 모든 게, 그저 내 욕심인 걸까.

 홀로 길을 걸으며 마지막까지 널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우리를 잇게 해 준 손, 따뜻한 네 품을 어루만질 수 있었던 손, 그리고 마지막까지 여운만 남긴 손을. 왈칵 터지는 울음에, 나는 한참 거리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울지 않기로 했는데, 너 없이도 잘 살아야만 하는데. 아이처럼 소리 내 울면서도 나는 또, 네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동그란 달이 예쁘게 차오른 밤, 차가운 겨울바람소리, 자정이 지나 주홍빛으로 바뀐 도로의 신호등, 그리고 그 사이 가슴을 붙잡고 울고 있던 나. 무척이나 행복하고 소중했던 그 찰나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네가 정말 보고 싶을 때,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리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달려가야만 널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시 안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언젠가, 너와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던 날, 그때 나는 네가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잘하면, 널 그리워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면, 시간이 지나면, 그럼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아프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나의 오만한 생각이었다. 내 인생에서 널 완벽하게 도려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너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내 곁에 있었다. 방 한 편에 덩그러니 놓인 책 사이에, 코트 품에, 가방 속에, 네 어깨에 기대 창밖을 바라보던 어느 버스에. 넌 언제나,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날 잔인한 행복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도 널 만날 수 없었다. 어디에서나 널 느낄 수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널 만날 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계절에, 잊기 힘든 너를 그저 덮어두어야만 한다는 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너는 덮이지 않았다. 덮어놓은 이불을 해치고 나와, 기어코 내 앞에서 그리운 눈빛을 그려내고야 마는. 덮어도 덮어도 계속, 계속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잘 살라고 내뱉으면서도, 눈물이 가득 찬 눈망울로 나를 지긋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나는 너 없이 못 살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을 읽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그 눈빛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도 그런 모습이 어여뻐서 또 웃었다가, 또 울었다가 했다. 넌 나에게 참으로 잔인한 행복이었다. 널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겨울이란, 늘 다시 되돌리고 싶은 특별한 계절이 되어 가는 중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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