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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an 21. 2022

이젠 나도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밤이 깊어지면 기나긴 그리움이 눈을 떴어. 동그랗게 찬 달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새하얬지. 눈동자에서 찬란하게 부서지는 달빛은, 그리움의 깊이를 더욱더 진하게 물들였어. 어떤 시간엔 네가 떠오르지 않았는데, 요즘은 하루 종일 네 생각만 났어. 낮엔 조금 괜찮았었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아. 너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찾아와 밤마다 문을 두들겼어. 열어달라고, 제발, 받아달라고. 네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 거리는데도, 나는 쉽게 그 문을 열 수 없었어. 문을 등지고, 입을 틀어막고 울었어. 혹시라도 네가, 내 울음소리를 듣게 될까 봐.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의 마지막 날 밤이 떠올랐어. 얕은 빗줄기는 소금 같은 눈송이로 변해 머리에 쌓이는데도, 어둠 속에서 내 얼굴을 바라보던 네 두 눈을.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면서, 춥지 않느냐고 상냥하게 내뱉던 네 목소리를. 품 안에서 나던 따뜻하고 포근한 비누향기를. 그날의 너를 잊을 수 없어서, 나는 밤새 온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어. 네가 무심하게 주고 간 향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리운 마음에 한 번 맡았다가, 그러다 또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 네가 보고 싶은데,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없는. 이제는 널 잊어야만 하는. 그런 숨 막히는 시간 속에서 나의 시간은 백 년처럼 흘러갔어.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모두 잊고 좋은 사람 만나자고 내가 말했지. 너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들을 내뱉었던 밤들에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행복하지 않았으면 했어. 이기적이게도 나는, 네가 날 잊지 않았으면 했어.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을 때, 서로의 뜨거운 품을 확인할 수 있게. 우리 앞에 다가오지 않을 거짓말 같은 미래를 상상하면서, 나는 가끔 네가 그립다가, 네가 그립지 않다가, 또 더욱더 사무치게 네가 그리웠어.

 생긋 웃던 미소가, 너도 아프면서 애써 괜찮은 척 안아주던 품이, 그러면서도 천천히 들썩이기 시작하던 네 어깨가 새벽 내 가슴을 어지럽게 돌아다녔어. 한참을 웅크려서, 예쁘게 울상이 된 네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몇 번이고 내 가슴을 처참하게 찢어놓다가, 나는 아주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그 어둠 속에서 너는 날 잊지 않겠다는 듯 빤히 바라보면서, 머리에 천천히 소금 같은 눈이 쌓이면서, 춥지 않느냐고 또 나를 안아주었어. 나를 몇 분, 몇 초마다 아린 추억으로 찢어놓더니, 이젠 또 내게 울지 말라고 위로해주었어. 그 아이러니한 새벽에 이제 나는, 네가 미운 건지, 너를 사랑하는 건지 조차 모르게 되었어. 다만 그저 네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미워도, 좋아해도, 이 마음이 어떤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난 네가 보고 싶었어.

 우울한 밤이 지났는데, 날이 밝아도 이젠 네 생각이 나. 이제는 네가 준 향수를 맡아볼 수도 없을 것 같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고, 네가 그립고, 생각나. 그래도 너에게 용기 내어 안부를 물을 수 없었어. 널 다시 마주하게 되면, 나는 다시 또 깊은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고 말 테니까. 너의 잔잔한 미소를 찾으려, 어둠 속에서 밤새 허우적거릴 테니까.

 겁이 나. 이젠 널 잊어버릴까 두려운 게 아니라, 영영 널 잊지 못한 채로 살게 될까 봐. 몇 날 며칠씩, 어둠 속에 빠져서, 이젠 그곳에 없을 네 얼굴을 찾아 헤매기만 할까 봐. 너만 아프지 않으면, 너만 불행하지 않으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젠 나도 나를 모르겠어. 사실은 나도,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너 없이 살아야 하니까, 그런 내 삶이 불행하게 느껴져.

 이젠 나도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빨리 시간이 흘러서 무뎌졌으면 좋겠어. 너의 봄날 같은 미소도, 따뜻한 품도, 포근한 비누향기도. 아련해져서 기억나지 않게. 우연히 널 다시 만나도 아무렇지 않게. 이젠 내가 너에게 흔들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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