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겨울의 끝에 서 있는 시간은, 눈물 날 만큼 눈부셨다. 눈앞에 드리운 햇살 아래 봄이 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봄. 봄이 온다는 건, 우리의 계절도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봄비 같은 비가 찬란하게 내리던 날 아침, 지난 새벽의 아픔을 그러쥐면서도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했다. 이 반복되는 행복의 지옥을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네가 우리의 행복을 끊어낼 수 없다면, 우리가 계속 우리를 욕심내고 있다면, 그럼 누군가는 모질게 이 사랑을 밀쳐내야만 하는 것이라고.
그날 밤은 나에게는 마지막 작별인사였다. 끝이라고 생각하니 울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아직도 네가 그립고 보고 싶었다. 너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주고 싶었고, 네 품에서 나던 향기를 맡고 싶었고, 네 얼굴을 만지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단지 그건 나의 욕심이었을까. 이제 더는 우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기한을 정하고, 그 기한까지만 참아보자고 했다. 너는 체념하듯 그러자고 했고, 나는 쓰린 속을 삼키며 전화를 끊었다. 우리에게 기한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에게 기한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그 기한만 참으면 정말 널 온전히 잊을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사실 널 덮을 자신이 없었다.
널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더 깊어졌다. 천년 같은 하루가 흐르면 농도 짙은 그리움은 눈물이 되고,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천년 같은 하루가 한 달을 넘어 일 년이 되고, 십 년이 되면 그때 즈음 무뎌지게 되지 않을까. 너도 날 완전히 잊게 되지 않을까. 그럼 차라리 이 모든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고.
널 잊어가는 과정이 괴롭겠지만, 널 잊기 위해 안간힘을 쓸 테다. 네가 놓고 간 서랍 속 향수를 열어보며, 아주 가끔 가슴 아파할 테다. 너의 미소 짓는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와 날 따뜻하게 품어주던 가슴을 잊어갈 것이다. 그런데도 네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땐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막막한 아픔이 밀려올 때는 그저 하염없이 울고만 있을 것 같다. 네가 미치도록 그리운데, 널 보고 싶지 않다고 되뇌며. 아니, 보고 싶지 않아야만 했다.
나는 가끔도 네가 꿈에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럼 꿈속에서나마 널 사랑으로 안아줄 수 있으니까.
사실 그렇게 모질게 했던 것, 내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해줄 텐데. 뜨거운 포옹을 하며 동그랗고 순수한 두 눈을 바라봐 줄텐데.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내 품에서 실컷 울라고 할 텐데. 그리고는 함께, 영원히 지지 않을 우리의 계절을 바라보며 입을 맞춰 줄텐데. 그럴 텐데. 하지만 너는 한 번도 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영영 사라져 버릴 사람처럼.
어둠 속에서 널 찾는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목놓아 네 이름을 부르면서 널 찾고 있다. 어디 있느냐고, 그냥 얼굴 한 번만, 아니, 목소리 한 번만 들려줄 순 없겠느냐고. 하지만 차라리 네가 대답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네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또다시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널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던 계절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을 추억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우리의 이별마저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끝까지 널 온전히 사랑하는 일, 사랑으로 널 지워내는 일, 이 모든 계절을 묻어두는 일 그리고 널 회상하는 일. 아프지만 어여뻤다고. 언젠가 먼 훗날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나는 널 정말 많이 사랑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