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Mar 03. 2022

사랑이라는 고백으로 나를 폭력하는 짓따위

 우리가 그간 쌓아온 숱한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지난 몇 달 동안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충격을 받았을 것도 당연했다. 갑자기 헤어지자니. 이렇게 쉽게 찢어질 거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기심으로, 혹은 겉으로 보이는 배려라는 포장에 관계를 지켜왔다. 그 알량한 보호막이 그래도 꽤 제 구실을 했는가 보다. 깨지지 않길 바라면서도, 한 편으론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내리지 못한 날들이었다. 다만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해야만 하는 숙제로 여겨왔다.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잘 맞지 않는 커플이었는지도 모른다. 속은 곪아서 썩어가는데도,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에게 진심이지 못했다. 온통 모든 것들이 거짓말이었다. 배려라는 포장 아래, 당신에게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이유로, 어쩌면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회피가 더 큰 마음의 병을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에 피는 응고되고 있었다. 피가 단단하게 굳어 조그마한 암덩어리가 되었을 때는, 마음에 큰 돌이 얹힌 기분이었다. 그게 단지 참아왔기 때문에 벌어진 이유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줄도 몰랐다. 난 그동안 잘 참는 사람이었고, 참아도 참는 줄 모르던 미련한 사람이었다. 모든 갈등과 원망과 우울도 한 여름의 소나기처럼 금세 지나칠 줄 알았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나는 결국 참아왔던 모든 마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배려나 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내게 따뜻한 상처를 입히기 위한 핑계처럼 느껴졌다.

 ─ 나는 당신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데, 왜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당신의 원망 섞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내 마음은 미동조차 없었다. 응고된 피는 출렁거림 없이, 차갑고 단단했다.

 ─ 글쎄. 왜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까.

 나조차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어떤 날, 당신을 진심으로 다해 사랑했던 순간마저 나는 아팠던 게 아닐까. 그 일말의 진심조차 거짓으로 느끼게 만들 만큼, 나는 아주 많이 병들이 있었다. 당신의, 당신에 대한, 우리의 지난 모든 사랑에 대한 날들이 왜곡되어 보였다. 그때 사랑한다고 말했던 순간은, 정말 사랑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단지 상처받고 싶지 않은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랑한다고 말해야만 서서히 지쳐가는 감정을 포장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은근한 배려, 거짓을 감추기 위한 고백, 옛 추억에 이끌리는 정 같은 것들. 과거를 포기하지 못해 끌고 온 덕에, 나의 현재가 무너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의 오늘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제 나는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됐다. 당신의 손끝이 내 어깨에 닿는 순간, 나는 오래된 석상처럼 부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과 마음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해풍을 맞고 바스러지기 직전의 모래 석상이 되었다. 이제 더는 내게 사랑이라는, 마음이라는 이유만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다. 당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따뜻한 상냥함만으로 나는 충분히 부서지고도 사라질만했다. 제발 그만해, 사랑이라는 고백으로 나를 폭력 하는 짓 따위. 당신의 사랑고백이 진심이었대도, 나에겐 뜨겁게 와닿지 못했다. 지금 나에게는 뜨거운 사랑고백도, 차가운 냉소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런 온도의 차이로 내 마음을 바로잡기에는, 그 감정이 너무나 평면적이었다. 난 조금 더 입체적으로, 사랑 외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내가 이토록 지쳐버리게 된 이유,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 죽을 것만 같은 이유를 나도 도무지 알 수가 없으므로. 당신과 우리의 세계를 지키기 이전에, 우선 내가 먼저 살아야겠으므로.

 이제는 사랑이라는 이름에 가려, 나의 오늘을 무너뜨리고 희생시키는 것 따위 안 하고 싶다. 언젠가 나는 이런 나의 마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과 우리의 세상을 지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우리의 세상이란, 이미 지난 추억이 되었다. 당신이 죽기 살기로 당신의 세상을 지키는 동안, 나의 세상도 함께 보살펴달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나의 세상은 그 누구도 지켜주지 못하니까. 그게 설령, 내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당신일지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