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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r 23. 2022

너의 마음 어디까지 손을 뻗을 수 있을까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허락을 구해야만 하는 사사로운 예의 따위는 없었다. 오래전, 처음 우리가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 때도,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먼저, 어쩌면 네가 먼저 시작했을 대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대화는 점점 인연의 끈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그걸 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너의 말대로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사랑은 늘 타이밍이라고 했다. 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비뚠 성미와는 다르게 그 '타이밍'이라는 단어는 서글프게도 우리의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사랑을 사랑인 줄 모르고, 우리는 그저 친근하다는 이유로 긴 우정의 끈을 이어왔다. 누군가는 우리의 우정을 시기하기도 했다. 우리가 우정이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즈음엔, 너무 많은 상황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진행되어 있었다. 우리의 사랑도 맞고, 주변의 시기도 사랑이 맞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첫 대화를 우정으로 시작했었듯, 끝도 결국 우정으로 맺어야만 했다. 그것만이 우리가 순수하게 사랑했던 지난날들의 사랑을 사랑으로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다.

 대화했던 순간들, 인연이라는 줄이 더 단단해지고 굵어질 때마다 나는 자꾸만 우리 사이를 착각하게 되었다. 내가 네 일상의 어디까지 침범해도 되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건 아주 비참한 참견 같은 것이었다. 네가 남 모르게 쓴 비밀 글을 찾아 읽을 때면, 나는 이상하게 그게 내 이야기가 아닌가 착각하게 되곤 했다. 네 연인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혹은 네가 사랑에 빠진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었는데. 내가 자꾸만 우리의 관계를 사랑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마음이 어떤 줄도 모른 채, 그걸 알아볼 용기조차 만들지도 않은 채, 나는 자꾸만 더 깊이 우리의 관계를 오해하기 시작했다.

 네가 마지막 날 남긴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나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었기에 메시지를 보냈을까.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 착각에 확신을 심어줄 고백 같은 걸까. 그러나 메시지의 내용은 중요치 않았다. 짙은 밤, 우리가 우리의 진심을 알아버린 이상, 나는 더 이상 널 친구로도 만날 수 없었다. 그게 설령 아주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한 사랑방식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해도 되겠느냔 예의를 차리지 않고 직진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사랑이라는 조각들을. 나는 지금이라도 너에게 예의를 차리고 싶다. 나에게는 네 인생을 침범할 권리, 네 사랑을 참견할 권리, 널 있는 그대로 좋아할 권리가 없다. 너는 네 방식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되고, 나는 내 방식대로 내 마음이 상처받지 않게 지키면 되는 일이었다.

 우정으로 시작해, 우정으로 끝나는 사랑에는 아주 복잡한 이론 같은 건 없었다. 우리는 정말 단순하게도,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면 되었다. 우리가 따뜻하게 응원했던 지난날들은 천천히 덮어둔 채로. 새하얗게 빛나던 추억들이 검게 타들어 잿가루가 되었을 때, 그 검은빛이 옅어지고 흩어지게 되었을 때, 나도 그때야 비로소 널 잊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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