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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r 28. 2022

넌 상처를 받아가면서까지 내 곁에 있을 거라는 걸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던 건, 어떻게든 너에게 꺼내 보여주고 싶은 진심과 널 품고 싶은 열망뿐이었다. 몇 개의 밤이 흐르고, 억겁의 시간을 눌러 새벽을 견뎠다. 산산 조각난 사랑을 주우며 가끔씩 옛일을 추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게 우리 모두에게 좋을 일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한다면,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면 널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복잡한 마음을 봄바람에 흘려보내면서,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다가오지 마라고 벽을 친 건 난데, 이상하게 마음은 정반대였다. 나는 언제나 네가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왜 그렇게 모질게 밀어내야만 하느냐고 묻던 네 얼굴이 떠오른다. 글쎄, 난 어쩌면 불편한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는 알량한 핑계를 대며, 결국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결정을 내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관계에는 항상 끝이 있었다. 끝을 생각하면 사랑도 무한히 건넬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널 생각하면 이별이 먼저 떠오르던 그때 내 마음 말이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여름날 소나기처럼 쏟아냈지만, 넌 다 이해했단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네 말을 듣고서야 이해했다. 맞다. 이 모든 핑계들이 사실은, 널 피해 달아나기 위한 나의 변명이었던 것이라고.

 뿔뿔이 흩어진 사랑의 조각들은 내 사물의 흔적에 기록되어 있었다. 어느 컴퓨터 드라이브 안에, 핸드폰 사진첩 안에, 책장 사이에, 머그컵 손잡이에, 화장대 서랍 안에. 그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물 안에 네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 나왔건만, 나는 결국 네가 없는 새벽에 울음을 터뜨렸다. 널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나는 아주 처절하게 널 사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물이 제 입술을 벙긋거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꼭 네 목소리 같았다. 어느 봄볕 아래, 살랑 불어온 바람에 흩날리는 나의 머리칼을 정돈해주던, 어느 날의 다정한 네 손길 같은 목소리로.

 무뎌져가고 있던 건 상황뿐이었다. 여전히 감정과 사랑과 미움은 더욱더 끈끈하게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네가 그리울 때마다 널 미워했고, 널 미워하는 중에도 여전히 사랑했다. 이 감정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조금 더 깊어진 사랑이라고 말할 테다. 사랑보다 더 짙은, 다른 느낌의 감정 같은 것.

 이제는 널 붙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너에게서 멀어졌고, 멀어질 이유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만들어 댔다. 넌 속으로는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날 위해 이해하는 척했다. 그 속에는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너의 따뜻한 배려나 사랑이 녹아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을 또 한 번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힘들어 죽을 때마다 널 찾았다가, 또는 내가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때 널 떠날 테니까. 잦은 만남과 이별 가운데서 진심을 닳게 만들고 싶지 않다. 널 사랑했던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차라리 좋았던 날들로 기억했으면 하는, 조금의 변색도 용납할 수 없는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런 잦은 만남과 이별 가운데서, 넌 상처를 받아가면서까지 내 곁에 있을 거라는 걸. 바보 같은 미소를 띠며, 괜찮다는 듯 실없이 웃으며, 또 한 번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리를 헝클일 것이다. 지겹게 내뱉은 "사랑한다"는 말을 또다시 속삭이며, 떠나지 말고 곁에 있으라고 할 테다. 나는 그런 네 얼굴이 싫어 영영 떠나기로 한 것이다. 넌 상처받으면서도 꾸역꾸역 내 곁에 있을 걸 아니까. 이제 더는 나도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

 ─ 내 곁을 떠나지만 말아, 응?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눈망울로, 한없이 나만 바라볼 테니까,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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