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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r 29. 2022

이제 네 이야기 쓰지 않을래

 고요히 물결치는 강가에는 평화가 살아 숨 쉬고 있었어. 우리는 어느 마을의 젖줄을 바라보면서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지. 어쩌면 흐트러진 요즘의 우리의 근간이었는지도 몰라. 강변에 가득 낀 지난 대화의 이끼들 말이야.

 널 지독히도 사랑했는데, 나는 자꾸만 네 사랑을 갈망했어. 남모르게 그러쥐어준 쪽지 속에는 우리의 비밀 암호들만이 난무했지.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자꾸 너의 메시지를 기다렸어. 삐뚤빼뚤 네 마음을 표현한 작은 편지와 일렁이는 감정들, 눈물 어린 진심과 원망들. 넘을 듯 넘지 않는 우리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처럼 고요하기만 했어. 어느 가을 새 한 마리가 강물 아래서 열심히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것처럼, 어쩌면 나는 우리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평온한 싸움을 해왔는지도 모르지.

 어떤 게 우리의 사랑을 온전히 지켜내는 일인지 알지 못했어. 남모르게 사랑하면 쟁취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관계는 아주 속절없는 것이었지. 세상의 시선은 모든 것들을 무너뜨렸어. 너에 대한 사랑도, 열망도, 관계도. 우리의 사랑은 세상의 시선을 이겨내기에는 작고 연약했어. 난 어쩌면 그 눈길을 견딜 수 없어서 초조하게 손톱만 뜯었던 건지도 몰라.

 노을빛을 그대로 비춘 강물이 금가루처럼 일렁이는 오후, 두 눈에도 반짝이는 빛이 일었지. 차가운 뺨을 어루만져주며 차분히 내 두 눈을 바라보던 네 얼굴을 떠올려. 네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던 건, 아주 오랫동안 널 보지 않아도 까먹지 않기 위해서였어. 눈물이 고여 턱밑으로 떨어지기 직전까지 널 바라보았지. 눈물이 흐른 순간, 나는 다가올 이별을 맞이할 준비를 했어. 일종의 예행연습이었지. 우리의 사랑을 강물에 던져버리는 것 말이야.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우리의 사랑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일만큼 끔찍한 게 있을까. 나는 우리가 점점 더 멀어질 때마다 어쩔 줄 몰라 두 발만 동동 굴렀어. 저걸 다시 건져내야 할지, 내버려 둬야 할지 결정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야. 어떤 날은 흘러가는 모습마저 기억하고 싶어서, 처연하게 기록하기 시작했어. 끊임없이 우리를 상기했고, 그렸고, 간직하려 했지. 하지만 시간이라는 게 참 야속하게도, 모든 추억들을 변하게 만들었어. 언젠가 노을빛에 붉게 일렁이던 마음이, 어떤 때는 무슨 색깔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어. 하얀색이었던지, 노란색이었던지, 아니 어쩌면 검은색이었을지도 모르지. 우리의 사랑이 명확히 어떤 색깔이었는지 가물거리게 된 순간, 나는 이제 더는 우리의 사랑을 추억하지 않기로 했어.

 이제 더는 네 이야기를 쓰지 않아. 어쩌면 우리의 사랑은 이별을 결심한 순간 죽어버렸는지도 모르지. 이제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 따위 갖지 않을래. 그런 마음마저 강물에 던져버릴래. 그걸 사람들은 미련이라고 하더라. 그래. 내가 아직 널 잊지 못한 이유일 테지.

 내 청춘을 다 바쳐 사랑한 지난날들이여. 어쩌면 우리의 과거이기 전에, 너와 나의 단면이기도 했던 풍경들. 이제 더 이상 색깔이 변하지 않도록, 자주 꺼내 보지 않을래. 힘들 때마다 아련해진 기억을 꺼내 놓고, 텅 빈 마음을 채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사랑은 제 몫을 다 한 것이라고. 내가 널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그 시간을, 천천히 느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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