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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Mar 23. 2022

그날의 여름을 기억해

 그날의 여름을 기억해요. 뜨거운 햇살이 찬란한, 연둣빛 잎사귀가 울창한 나무 밑에서였죠. 더위가 찾아와 아스팔트 위에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어요. 열기를 뚫고 신기루처럼 당신이 피어올랐어요. 저 멀리 언덕에서, 머리부터 허리춤까지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죠. 당신에게 주려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산 생수를 이마에 댔어요. 꽁꽁 언 생수가 조금 녹아서는, 페트병에 맺힌 물줄기가 손목을 타고 겨드랑이까지 미끄러져 내려갔죠. 짧은 흰 반팔은 등줄기부터 목덜미까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어요. 더위 속, 시원한 그늘 밑에서 말이에요.

 ─ 미안해. 내가 많이 늦었지?

 캡 모자를 한 번 들었다 다시 쓰며, 당신은 살짝 인상을 썼어요. 그 표정은 미안함과 난처함으로 얼룩져 있었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당신에게 생수를 건넸어요. 얼음이 녹아 물이 조금 흘러나오는, 얼음이 헐떡이는 생수를 말이에요. 당신이 살짝 눈웃음을 짓고는 뚜껑을 열어 생수를 들이켰어요. 얼음밖에 남지 않자, 혀를 내밀고는 생수를 통통 쳤죠. 그러더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생수 뚜껑을 닫았어요.

 ─ 우리, 바다 보러 가자.

 당신이 가장 먼저 내뱉은 오늘의 계획이었어요.


 그날의 바다는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였어요. 해변을 뛰어노는 아이들을 피해, 천천히 바닷가를 걸었어요. 이따금 발등을 튕겨 물을 뿌려주고는, 도망치고 쫓아오기를 반복했죠. 그렇게 인적이 드문 갯바위까지 다다라서야, 우리는 잠시 머물 그늘을 찾았어요. 조금 높은 언덕에 울창하게 뻗은 소나무가 보였죠.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었어요. 솨아- 있는 힘껏 몰아치는 파도, 힘없이 부서지는 하얀 거품, 뜨겁게 일렁이는 윤슬까지. 여름 바다의 모든 색깔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어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리는 파도와 목선과 쇄골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씻어주는 바닷바람, 선선한 소나무 그늘, 찬란하게 떠오른 여름 햇살 그리고 당신. 당신은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훑어내며 나지막이 말했어요. , 시원하다. 이상하게  말이, 저를  시원하게 만드는  같았어요.

 당신의 말에 모든 게 괜찮아졌어요. 더워서 죽을 것 같던 순간도, 이상하게 메슥거리던 마음도, 갑자기 아주 깨끗하게 씻어졌어요. 당신은 그 어느 햇살보다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바라보았어요. 저는 조금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당신을 쳐다보았어요. 당신이 언제 나에게 이토록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적이 있었나. 당신이 조금 낯설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가슴이 저미듯 심장이 아팠어요. 오늘 당신을 만나던 날을 떠올려요. 폭염의 언덕을 오르는 당신을 발견한 순간, 어쩌면 나는 약속에 늦었다는 짜증감보다는 행복감이 더 크게 밀려들었던 건 아닐까. 달의 중력으로 어쩔 수 없이 끌어당겼다 밀렸다 하는 파도처럼, 저도 모르는 새에 당신에게 이끌려가고 있던 것이라고요. 저는 당신 모르게 키워왔던 감정을 꼭꼭 눌러놓은 채로 당신을 바라보았어요. 당신은 나의 혼란스러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상냥하고 귀여운 눈웃음으로 날 바라보았어요.

 ─ 다음 여름에도 여기 꼭 오자. 우리가 찾은 장소니까, 너랑 나. 우리 둘만의 아지트야. 다른 사람한텐 비밀!

 당신이 검지를 입에 대며 생긋 웃었어요. 저는 대답 대신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글쎄요. 우리에게도 다음 여름이 있다면, 그때의 저는 아마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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