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영 May 16. 2022

순간들을 아울러, 빛이 태양이 될 때

 모든 순간들을 아울러보면, 그 어떤 날도 찬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네가 꿈속에서 애타게 날 찾고 있다면, 넌 어쩌면 과거의 순간 속에 아직 살아가고 있는 줄도 모른다. 이따금 느껴지는 너의 시선과 훈김과 아픔들은 나도 가끔 그날을 회상하게 만들곤 했다. 나는 철저히 너를 지워나가는 중인데, 너는 더 크게 그리움만을 부풀리고 있을 테다. 이렇듯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일만큼 가슴 저미는 것도 없으리라.

 네가 나에게 손을 뻗으려 발버둥 칠 때마다, 네가 부딪힐 벽이 얼마나 높게 느껴질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시간은 물리적인 여유가 없었고, 현실은 반복된 계획 속에 굴러갔다. 네가 날 그리워할 때마다 달려올 수 있었던 때는, 그 찬란한 겨울이 녹아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봄,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봄 위에 우리의 사랑도 천천히 녹아가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너에게 마지막 이별의 말을 꺼냈던 때가 떠오른다.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을 두고서 널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너는 진심으로 받아들였을지 핑계로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며, 당신만 아프지 않으면 된다며 끝까지 고개를 끄덕거리던 넌, 속으로 어떤 다짐을 했을까. 날 위해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마지막 인사라고 여겼던 걸까. 색을 알 수 없는 너의 다짐을 살펴보지도 않은 채 나는 그렇게 돌아섰다. 맞다. 나는 다시는 널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조물주도, 신도 아니다. 내 멋대로 지난 우리의 추억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그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네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생각하며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긴 새벽, 이불속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내가 달아나 없어지는 악몽을 꾸면서도 또 한편으론 날 미워하고, 또 한편으론 날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는 걸. 너의 뼈저린 아픔 곁에 내가 있어줄 수 없다는 사실도 너무나 극명하게 알고 있다. 나 또한 아무리 널 그리워 한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그래도, 그래도 나는, 우리의 찬란했던 과거와 앞으로 그려나갈 각자의 미래를 위해 이별을 견뎌야 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그게 내가 너에게 손을 뻗지 않을 이유다.


 언젠가 나도 죽을 만큼 누군갈 사랑했던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나 아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떠나겠다고 했다. 그 야속함, 그 슬픔 속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그 사람을 원망한 적 없었다. 단지, 그 사람 곁에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내가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는 통탄만이 아주 긴 나날 동안 지겹게 좇아 다녔다. 나도 열렬히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나도 부족함 없는데, 나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데. 그 멍청이 같은 반복 속에 감정을 밀어 넣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난 후에야, 나는 그날의 이별이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는 걸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처음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을 통보받던 순간까지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으나, 그 시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성숙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대단한 몸살과 눈물 속에서, 나는 사랑과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한층 더 키웠다. 그렇게 조금씩 도망치는 법도 배웠고, 상처받지 않는 법도 배웠고, 누군갈 최선을 다해 좋아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한없이 내어줄수록 아프기만 한, 언젠가 맞이할 이별을 눈앞에서 직면하는 일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우리의 모든 순간들을 손으로 꼽아보면, 단 한 번도 빛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너는 어느 순간, 어느 시간, 어느 날들에나 늘 순수한 미소로 날 바라보곤 했다. 그건 시간이 흘러 추억이 되어버린 시절 속에도 각인되어 있다. 넌 날 어떤 빛깔로 기억할까. 찬란하게 아름다운 빛으로 기억할까, 아니면 아주 새까만 검은빛으로 기억할까.

 어쩌면 우리는 아주 먼 길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방황하던 우리가 만나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얼어있던 시절의 입술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다시 찬란한 봄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것이라고. 너를 만나 바로설 수 있었고, 너를 사랑하며 사랑의 순수함을 알았다. 네가 나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이 처음이었던 것처럼, 나도 너에게 느끼는 모든 감정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서로를 기억할 수 있으리라.

 넌 나의 겨울에 아주 찬란한 빛이었고, 뜨거운 태양이었고, 포근한 함박눈이었다는 걸.

 시간이 지나도 급하게 잊지 말고 은근하게, 오래오래, 그렇게 추억 속에 덮여가는 영겁의 계절이 되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Like the Movie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