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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un 21. 2022

나의 밤, 당신이라는 단 꿈을 꾸었다

 열대야로 이글거려 밤잠 이루지 못하던 나의 새벽에 어느 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잠결에 집중하지 못했던, 그러나 분명 포근했던 바람의 품은 아주 긴 밤 내 온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조금 낙낙한 목소리로 내게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고,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편안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기도 했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바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꿈이었다.

 내가 당신이라는 꿈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잠시 착각했던 것 같다.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숱한 세월을 보내오면서 깨달았음에도 나는 우리가 영원할 줄만 알았다. 당신 없이 보내는 여러 날의 밤들은, 이제 쓸쓸하다 못해 차가웠다. 당신을 만나면서 누그러진 더위가 이제는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기력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의미 없는 필사만 끼적였다. 그리움을 지우려 무던 애를 썼는데, 그리움은 오히려 종이 안에 진득하게 남았다. 울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침을 삼키면서도, 목울대는 연신 울렁거렸다. 당신 없이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해야만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무와 부재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을 쓸쓸함이었다. 가슴이 텅 비어 공허한 기분이 들 때면, 나는 자꾸만 새로운 무언갈 욱여넣으려고만 했다. 자꾸만 일을 찾아서 하려 했고,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일상을 마치고 나면 더 큰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텅 빈 기분, 공허함, 공백. 그건 마치 내 안에 뜨겁게 이글거리던 무언가가 한 번에 쑥 빠져나간 것처럼, 아주 금세, 차갑게 식어버렸다.

 혼자만 실음 하는 텅 빈 사투 속에서는 승자가 없었다. 누구와 싸우는지도 모르는 긴긴 인내와 고통 속에 그리움은 더욱더 짙어졌다. 외롭지 말아야지, 그립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가끔 당신의 그림자는 아주 짙게 내 주변을 맴돌았다. 어디에서나 당신은 있었다. 날 따라다니며 상냥하게 웃던 얼굴이나, 포근하게 안아주던 품이나, 다정하게 내려다보던 눈빛들.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런 것들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더라도 울컥 울음이 치솟곤 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당신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당신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는 이제 내게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존중해주기 위해, 나는 내가 견뎌야 할 시간을 돌아보아야만 했다. 이 순전한 가시밭길을. 내가 이 고통을 버틸 수 있으려면, 최대한 당신을 내 일상에서 지우는 일뿐이었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아직도 날 그리워할까, 이제는 날 용서했을까, 아니면 다른 무슨 방법이 있는 걸까. 그러나 답이 없는 사랑에는 언제나 서글픈 이별만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제 더는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상처를 받는 것은, 당신이 상처를 받는 일이었으니까.

 아주 긴 밤, 단꿈을 꾸었다. 당신과 함께했던 지난날들이, 아련한 꿈처럼 남았다. 이제는 추운 밤, 당신의 꿈을 기다리며 잠에 들 테다. 포근하고 상냥했던 바람. 열대야가 우글거리는 여름, 상냥하게 불어온 바람처럼. 3월 봄날의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진 봄비처럼. 당신은 내 마음을 푹 적시고는 그렇게 아득한 저 너머로 증발하는 중이다. 그 증발, 달아나지 않는 당신의 그림자, 그 진득한 그리움과 외로움의 사투 안에서 나는 조금씩 멀어지는 당신을 본다. 나에게서 천천히 멀어지는 당신을, 그러나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할 당신을, 붙잡지도 못한 채 아득히, 바라만 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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