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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un 22. 2022

여름, 빨래 그리고 해변의 모래성

 따사로운 햇볕들이 크리스털로 부서지는 여름, 창밖은 아지랑이로 일렁였다. 축축하게 젖은 마음들을 빨랫줄에 잔망스럽게 걸어놓고는, 무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봤다. 누군가 그랬던가, 망각은 축복이라고. 잊었을 때야 비로소 기억은 완성된다고. 조금씩 잊히고 닳아져야,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간 아름답게 기억될 날이 올까. 턱을 괸 채로, 그 젖은 마음들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한다. 언젠가 아득해질, 선명한 그의 얼굴을.


 햇살이 차츰 뜨겁기 시작한 봄에 우리는 열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해변 곁을 달리던 열차 안은 수많은 인파 사이에도 뭉근한 눈빛들이 가득이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감탄만을 일삼던 이들은, 그 바다를 조금 더 가까이 보겠다며 열차에서 내렸다. 열차에서 내리지 않은 이들은 사랑하는 이의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그 풍경에 젖어 있었다. 그렇게 내 마음도 차츰 젖어갔던 것 같다.

 우리의 이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언젠가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는 자꾸만 현실을 회피하고만 싶었다. 늘 햇살처럼 찬란했으면 했고, 가슴은 영원히 뜨거웠으면 했다. 현실적인 것들이 저물어야만 비로소, 우리의 진심은 완성되었다. 간절히 지키고 싶었던 관계와 마음들, 그리고 진심과 사랑. 종착역에서 내린 나는 해변의 모래를 한 줌 쥐어다 차곡차곡 모래성에 쌓았다. 바닷물을 넣어 단단하게 만들고, 양동이를 엎어 모양을 만들었다. 누가 발로 차도 절대 엎어지지 않을, 아주 단단한 모래성을. 우리의 사랑, 관계, 마음들을.

 그러나 거대한 자연의 파도는 모든 것들을 속절없이 무너뜨렸다. 무너지지 않게 만들고 싶었던 관계, 사랑, 우리의 영원할 것만 같던 눈빛들은, 그런 현실적인 것들에 쉽게 부서지고 쓰러졌다. 분명 영원히 사랑하자고 약속했는데, 이 두 손 놓지 않고 꼭 붙잡기로 했는데, 약속은 모래처럼 쉽게 흩어졌다. 어느덧 우리는 다시 열차에 올라야만 했다. 다시없던 일로, 없었던 것으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감행해야만 하는 것.


 언젠가 이 축축한 빨랫감들도 뜨거운 햇볕에 굴복하게 되리라. 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온전히 잊게 되는 날이. 그때부터는 변색이 된 추억들로, 각기 다른 기억들로 서로를 추억하게 되리라. 언젠가 사랑했던, 두 번 다시없을 우리의 마지막 모습들을 그리워하게 되리라.

 그래도 우리, 이런 마음이라면 언제든 다시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웃으며 함께 해변 열차를 타고, 다시 또 견고한 모래성을 쌓아가게 되지 않을까. 그때는 해풍과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우리의 온몸이 부서져라 소중한 마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그것 또한 쉽게 부서지고 말까. 우리의 사랑을 그저 추억 속에 내버려 둬야만 하는 것일까. 망각은 축복이니까. 잊었을 때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니까.

 재회할 수 있다는 소망과 이별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이에 그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를 가시관처럼 옥죈다면 누군가 하나는 손을 놓아야 할 테지. 그런데 난 자신이 없다. 이 빨랫감이 바짝 마르고 나면, 다시 축축하게 마음을 젖힐 수 있을까. 두렵다, 마음을 말리는 과정이 너무나 길고 잔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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