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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영 Jul 04. 2022

당신을 덮기 위해 미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밤, 켜켜이 쌓여가는 사랑이라는 뜨거운 감정 곁에는 늘 미움이 함께 했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거나 덮기 위해서는 미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미움 없이는 그 사람을 완전히 덮을 수 없었다. 사랑만으로 덮인 관계들은 언제나 바락바락 다시 기어 나왔으니까. 엉성하게 덮인 마음 사이로 미련과 후회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미련과 후회를 먹은 그리움은 사랑스러웠던 너의 눈빛마저 처연하게 만들었다. 내가 영영 당신을 잊지 못한 채 살게 될까 봐, 이렇게 무너진 채로 너 하나만 그리워하며 살까 봐, 당신을 만나고 싶을까 봐, 두렵게 만들었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일조차 악몽이 되어갔다.

 당신을 후회 없이 사랑했고, 그래서 미련도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만 난 머릿속에 당신의 얼굴을 그리는 걸까. 이제는 무뎌질 때도 됐는데, 당신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됐는데. 그래서 나는 조금씩 당신을 미워하는 연습을 했다. 내가 누군가들을 잊고 달아날 때, 그들을 증오하고 경멸했으므로. 미움만이 당신을 덮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이별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근본적으로 틀리지 않았으니까. 미워했기 때문에, 이별이 있었다.

 감정이 고요한 함박눈처럼 쌓이는 밤이다. 눈송이는 멀리서 보면 사려 깊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표면은 뾰족뾰족 차갑게 날이 서 있었다. 당신을 향한 감정이 그런 눈송이를 닮았다. 가까이 오지 마라며 표창 같은 결정들을 뻗쳐보아도, 당신의 뜨거운 손길에는 속수무책으로 녹아 흘러버리는 눈송이 같은 마음. 긴 밤, 나는 당신을 처절하게 증오하면서도, 그러면서도 그러지 못해 힘겹게 가슴을 그러쥐었다. 당신을 미워하고 싶은데,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 꾸며진 미움 안에서 그리움만 점점 더 깊어지던 밤. 열대야가 우글거리는 초여름의 기운 사이, 내 가슴은 어느 늦겨울의 밤처럼 차갑고 시리기만 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초조해하며 무릎을 껴안고 웅크렸다. 외로웠다. 사무치게, 당신이 그리웠다.

 혹시 당신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당신의 연락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욀 수 있는 당신의 연락처를. 오늘따라 숫자와 숫자 사이가 더 가깝게 밀착되어 보이는 번호를. 다정한 애칭으로 저장되어있는 이름을. 차마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팔뚝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훑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이러는 내가 싫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빠진다.

 누구나 이별을 경험하고, 누구나 사람을 미워한다.

 그 평범한 순리를, 왜 나는 할 수 없는 걸까. 이별 뒤, 당연히 당신을 미워할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겐 없는 걸까. 내가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 어쩌면 난 당신의 미움마저 사랑했던 게 아닐까.


 당신을 미워할 수 없는 내 마음을 열어 들여다보았다가, 다시 한숨으로 덮었다.

 알고 보니 내 마음은 아직, 당신과 이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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