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무신만으로도 그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멋있었다. 감정 과잉이라 해도 어쩌랴. 그를 향한 저릿한 감정 동력이 발동한 것임이 틀림없었으니. 아마도 그는 우리 집 앞을 지나 시장통을 가로지르고 육교를 넘어 대로변에 있는 화실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옥상이 있는 집에 살았다. 빨래를 말리는 너른 옥상에서 종종, 다른 집 지붕 생김새나 색깔, 외부에 노출된 살림살이 등속을 보며 꿈같은 암호를 생각하곤 했다. 암호란, 그 집에 살고 있는 그 집 사람들만의 에너지 같은 것. 어느 날, 반짝이던 햇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비가 왔다. 이 꿈에서 저 꿈으로 순일하게 들려오는 기타 소리에 말라가던 빨래가 축축해지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빗줄기 사이로 뿌려지는 아련함이 기타 공명의 암호였다. 이 꿈결 같은 주밀한 느낌은 기타 치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으로 증폭되었다.
그녀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장마철 물난리 때였다. 물로 벼락을 맞은 동네는 물바다가 되었다. 일주일 동안 마당에 들어찬 물은 마루로 넘어오기 일보 직전. 그녀의 가족이 옥상으로 대피했을 때, 다른 집 옥상에도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다. 동병상련이 이런 것인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같은 편이 되듯이 서로 물난리를 걱정하면서 물이 어디까지 들어찼는지를 묻고 대답하는 어른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 가족 구성을 알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그가 기타를 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의 손에 기타가 들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를 처음 보고는 그녀의 온 마음과 몸의 감각이 활발하게 움직였고 진동했다. 꽤 오랫동안 이상한 감정이 맴돌면서 마음이 연속적으로 회오리치며 총체적으로 떨리는 상태였다.
그의 첫인상은 선명했다. 마치 전혀 생면부지의 사진을 본 후에도 얼굴 윤곽이나 인상을 좌지우지하는 지점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처럼, 짙은 눈썹에 비해 뚜렷하지 않은 이목구비가 잊히지 않았다. 왼쪽 입꼬리 부분 아래턱에 있는 점, 맹탕으로 보이지 않는 짧은 말총머리, 일자로 다문 입이 과묵해 보이기는 했으나 오히려 주술처럼 말이 새어 나올 것 같은 조금 얇은 입술. 물이 들어찬 길을 내려다보며 눈을 약간 찡그리곤 했는데, 그것이 사뭇 문학적 기질로 보였다. 감수성이 덩어리로 옮겨 다니던 그 시절의 그녀는, 세상을 향한 냉소적 느낌이 문학의 동류항으로 이해되곤 했으니까.
물난리를 겪고 난 후, 그녀는 그를 자주 생각했다. 기타 소리가 들려도 그를 생각했고 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를 생각했다. 그의 집을 지나칠 때 둥둥거리는 마음 때문에 살금살금 걸었다. 그와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하다가 정작 마주치기라도 하면, 상당이 쑥스러워했다. 그를 보고 싶어 했던 마음이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마저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은 밑창이 땅에 박혀도 소리가 나지 않고 비에 젖을까 봐 그다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땅은 고무신에 짓눌려도, 부당한 압력이라고 느끼지 않는 어떤 친밀감으로 불편한 소리를 흡수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집 앞을 지날 때, 신작로를 걸을 때, 좁고 시끌시끌한 시장통을 지날 때, 육교를 오르고 내릴 때, 고무신을 신은 그의 발걸음에 나란히 동행하는 내 발걸음을 상상하던 날들. 세상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생각을 흡수하듯이, 고무신은 무음으로 교신하는 감성의 소용돌이 같았다. 발가락 열 개가 보이지 않는 신발 중 고무신은 신발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하나하나가 말랑말랑하고 유연한 고무 재질과의 유희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것마저 개연성이 충분한 예술 기질로 느껴졌다. 심상하고 때로는 조심스러운.
시간이 흘렀다.그녀의 가족은 서울 변두리로 이사했다. 이층 집을 처분해서 남은 돈으로 마련한 집, 좁지만 홍수에 끄떡없는 집, 터무니없는 위안거리라도 찾아야 하는 그런 집으로 말이다. 너른 논과 밭이 조악한 연립 주택으로 변해가는 동네 건설 현장은 황량했다. 아직 미장 공사가 덜 된 건물은 흉터처럼 보였고 비포장도로에서 날리는 먼지는 흉터를 덮으려는 거간꾼 같았다.
앞 코에 미끄러지지 않고 차분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도 반짝반짝 빛나는 군화를 신고 그가 나타났을 때, 자동차 시동 걸듯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휴가 나왔어. 한참 찾았는데…, 연락할 길이 없어서 무척 애 먹었다.
그의 음성이 더 이상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았다. 먹고사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말이 필요했던 그녀에게 그가 하는 말은 공사장에서 들리는 소음에 흡수되고 말았다. 슈퍼 앞 둥근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그와 그녀는, 파라솔 의자에 앉아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그녀는 허허한 공터에 짓다 만 연립 주택과 조만간 까뒤집어질 논과 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옛날, 고무신 한두 켤레 사는 것이 지금의 명품 가방을 사는 것처럼 물질에 대한 욕망을 극도로 나타내던 시기를. 흰 고무신이 유행의 첨단, 부의 척도였던 시절을. 고무신 유행이 잦아들 거로 생각하고 미리 사두지 않아 무척 상심한 상인들을. 고무신의 위력이 시들기는커녕 거세지기가 한참이나 이어졌던 세상을. (조정래, 『아리랑』 내용 참조)
그래서 그녀는, 흰 고무신에 대한 독점권을 내려놓아야겠다고, 사재기할 여력이 없으니, 유행이 잦아들 거로 생각한 상인처럼 그 기세가 시들지 않아 배가 아파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파라솔 지붕에서 후드득, 빗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와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비가 들이쳤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그의 검은 군화에 잠시 머물다 또르르 땅으로 스며들었다. 군기 가득한 낯선 군인의 얼굴.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주술 같은 침묵.
허상이라고 해도 믿고 싶었던 고무신의 위력은 빗물에 씻겨 땅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무언의 시간은 공허하고 무의미하고 황량했다. 그리고 아렸다.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은 제삼자가 전혀 해독할 수 없는 심술궂은 역설이었다. 그 누구와도 관련이 없는, 쓸데없는 정보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