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부탁하려는 줄 알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가올 것 같으면서 멈추기를 몇 번, 그러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고서야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아픈 이야기가 앞서고 시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물건을 샀는지 눈길이 가는 것처럼, 그림책 전시회에서 시절 인연을 만나니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마치 그림책 책장을 넘기듯이 펼쳐졌다.
그녀는 화가의 꿈을 이루었지만, 꿈꾸는 재주로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모험했다. 모험이란 만화가가 되는 것. 서양화가였지만, 만화도 그리고 글도 썼다. 그녀가 출간한 만화 에세이(시사만화가 주를 이룬)에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서사가 담겨있는데 내용에는 고향이 주는 특별함이 있었다.
작품 곳곳에서 내가 알고 있던 그녀보다는 작가로서의 그녀를 만나는 것이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웠다. 글과 만화를 유기적으로 연결한 고심이 감동으로 느껴질 때는 자랑스러움 비슷한 것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오기 전까지는 전주에서 살았는데 그 시절을 상당히 좋아했음을 작품으로 알 수 있었다. 특히 오목대에 대한 묘사는 마치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승전을 자축했다는 장소다. 그러나 그녀에게 오목대는 이성계처럼 기세등등한 흥분이 넘치는 곳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족사에 대한 애잔함을, 개인의 불안함을, 미래의 불확실함을 해소하는 장소였다. 꿈을 위해 서울로 떠나고자 결심을 굳혔던 곳이 오목대였다. 외롭고 쓸쓸할 때마다 오목대에 올라 한옥 풍경을 바라보던 날들과 산동네에 살면서 동동거렸던 날들이 추억이 되어 그녀 작품의 밑동이 되었고 서사의 얼개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더구나 고향에 대한 정체성이 예술가로서의 삶과 깊게 연관되었음을 잔잔한 문체로 이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나. 그녀와 함께했던 날들이. 그녀와 만남에서 어떻게 문학이 빠질 수 있겠는가. 특히, 최명희 작가의 『혼불』을 읽으며 보냈던 시간은 그 시절을 통과한 우리에게 훈장처럼 든든했다. 17년에 걸쳐 탄생한 전 10권의 대하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묘한 공동체 의식을 느꼈다. 『혼불』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던 시대적 즐거움을 공유하면서 21세기를 향해 전진했다. 특히 대나무 숲 풍경으로 시작하는 ‘대실마을’을 묘사하는 소설 도입부는 두 페이지나 된다. 바닥날 듯하면서 이어지는 문장은 마치 판소리를 듣는 것처럼 리듬이 있다. 아마도 그녀가 없었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과 세밀한 묘사로 전통적 소재와 유교적 이념과 민속적 가치를 표현한 작품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만났어도 끝까지 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시관 밖 테이블에 앉았다. 한참 동안 서로 웃기만 했다. 훌쩍 지나간 세월이라는 시공간에 대해 어떤 기호나 부호로 이야기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세월이라는 흐름 앞에서의 기억. 그림과 글에 대한 시간을. 아무 일 없이 지나는 삶은 없더라. 운이 좋았던 적도 있었다. 문학이 마음을 단단하고 편편하게 만들기는 했지 등등. 두서없는 낱말과 단편적 문장이 머리에서 빙빙 돌았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마치 모빌처럼 눈앞에서 대롱댔다.
그녀는 나를 보고는 “변한 것 같기도 하고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다”며 웃었다. 웃다가도 말할 때면 눈에 힘을 주곤 했는데, 그럴 때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듯했다. 눈을 크게 뜰 때는 숨도 크게 쉬었다. 숨을 몰아쉬는 일을 반복적으로 해왔던 일인 것처럼 숨을 내쉬다가 무언가 다짐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압축하듯이. 압축된 그녀의 말을 풀어보니, 잘 지냈으나, 힘든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 꽤 오랫동안 아이가 아팠고 지금은 일상생활이 점점 가능해지고 있다고. 그러다 무르춤하게 다시 눈을 크게 뜨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여전히 만화를 그리고 그림책 에세이를 쓰고 있다고. 예술 세계에서 어찌 동심의 힘을 잊겠느냐며 그림책에 대한 관심을 소곤거리듯 말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 위해, 주제에 맞는 그림책을 선정하기 위해 도서관을 다녔던 이야기, 그래서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은 그림책이 많아서 행복했던 이야기, 아이가 글씨를 몰라도, 아니, 오히려 몰라서 그림책을 맘껏 볼 수 있어서 좋았던 이야기, 어느새 부모가 되어 아이 덕분에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젊은 날, 그녀와 내가 함께 탐하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면서 아련한 눈길도 나누었다.
그림책 페이지마다 소멸하지 않는 색과 그림과 선으로 신화적 느낌을 아이와 함께 공감했던 날들, 창문같이 펼쳐진 그림책으로 아이와 함께 세상을 여행하던 날들이 누구나 겪었던 유년 시절을 소환한다. 그 시절의 기억과 추억의 빛으로 성인이 된 아이는 현실이 행복한 결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책임감을 잃지 않으려 살아가며 가끔은 책임감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를 안다. 힘이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살고, 힘이 들 때, 세상살이의 또 다른 방편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산다.
그녀는 유년 시절에 시각화했던 전주에 대한 이미지가 자기 예술 영역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가난해서 눈치를 보았고 그래서 종종 외로운 삶이었지만, 가족의 따뜻하고 자별한 관심으로 좋은 감성을 맘껏 표현했던 유년 시절 기억이 모여 어려움을 이겨내는 동력이 되었음을 모르지 않는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사그라지지 않을 힘이 될 것이라고. 그녀의 아이도 몸이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잠재된 추억이 어느 찰나가 아님을 느끼며 건강을 되찾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말랑말랑했던 감성과 이성의 조합이 자기 삶을 응원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원화, 『만희네 집』(길벗어린이, 2016)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만희네 집』은 좁은 연립주택에 살다가 할머니 댁으로 이사 간 만희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만희는 할머니의 집이 궁금하다. 집 안 여기저기 다니는 만희 동선 따라 그림과 이야기가 진행된다. 동선은 먹빛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도 오래된 동네에 남아있는 옛 시절의 가옥. 나름 현대식으로 지은 1970년대 유행했던 건축 형태. 할머니 방과 부엌, 광과 장독대, 뒤꼍과 앞뜰, 마루와 목욕탕, 만희 방과 옥상. 특히 책이 가득한 아빠 방에서 놀고 있는 아빠와 만희의 얼굴이 익살스럽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집이란 편안하고 즐거운 곳이며 마음 근심이나 어려움을 내려놓는 곳이기도 하다.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모르기에 새로운 마음에 나타나는 기호로 인생을 그리는 곳이다. 혹시 잘못 그렸다면 다시 그리면 되는 곳. 아니면 그 위에 종이를 다시 붙이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도 되는 곳. 집 안 곳곳에 있는 물건도 요리조리 규칙이 있는 것처럼, 산란한 마음도 자기의식으로 만들어진 색채와 자기 시각으로 형성된 결정체가 아닌가. 자기 철학을 형상화하는 공간이 집이라는 것. 마치 그림책을 펼치면,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보이는 것처럼, 산란한 마음조차도 풍경이 되는 역설이 존재하는 곳. 마치 문학처럼.
책은 희망이나 가능함을 이야기하지만, 불안이나 허망함도 이야기한다. 그러다 종종, 고독이라는 그늘에서 도원결의한다. 버림받은 이야기를 재생하기 위해서다. 마음을 뻗어 그 이야기에 서명하고 자기를 포함한 세상 모든 것과 눈 맞춘다. 약간 엄살떨면서도 수십 번 되풀이된 이야기에 어설픈 긴장감을 더한다. 그렇게 한 발, 두 발 발걸음을 내디디며 이야기를 만든다. 강물 같고 바람 같은 마음으로 생태적 욕망이 정신적 가치가 되기를 바라면서.
책으로 연결된 고리는 어떤 형태로도 연결된다. 앞뒤 틀어막는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발끝에서 손끝으로 이어지고 모인다. 모인 힘이 온몸으로 퍼져 삶을 이어가는 언어가 된다. 생존에서 탄생한 언어는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삶의 근원을 생각하게 된다. 마치 자기가 사는 집처럼, 자기가 태어난 곳처럼, 그렇게.
문학 근처에서 기웃했던 지난날이, 예술이 펼쳐지는 공통의 기억이 사람을 연결하는 오묘함에 놀란다. 마치 지구인의 사명처럼 이동하면서 살 듯이, 각자의 삶을 살다가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나는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녀와 나는 예상하지 못한 공간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 떨어져 있다가도 교차하거나 엇갈리면서 문명이 발전했던 것처럼, 문학도 마찬가지다. 그녀와 함께 읽었던 『혼불』처럼 우리의 삶은 영혼의 불꽃같은 여정으로, 영혼이 살아 있는 불처럼 타오르듯이, 정신의 불멸성을 꿈꾸며 산다.
최명희 작가는 “모국어에 의지하여 문장 하나를 세우고, 그 문장에 의지하여 한 세계를 세어보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작가의 말에서 정체성의 다양한 바탕을 이루는 혼은 자기와 타인의 삶을 서로 깊이 이해함으로써 서로가 바라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나와 함께 혼불을 읽으며 젊은 날을 버텨냈던 그녀가 서양화가이면서 만화가이기도 하고 만화와 그림책 에세이 작가로 거듭나는 삶의 과정이 푸른빛으로 빛난다. 그녀만의 빛은 그녀만의 배경이다. 정체성의 기틀이 된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의 예술이 푸르게 빛나기를.
기억하고 표현하고 기록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 죽은 자의 영혼도 함께 하는 것. 이처럼 삶과 죽음은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는 것을, 예술을 통해 영혼을 불태우는 것을 모를 수 없다. 한 사람의 혼을 이루는 빛이 빠져나갈 때, 푸르게 빛나는 것처럼, 한 사람의 꺼지지 않는 혼불을 간직하면서, 푸른빛으로 차오르는 순간을 기다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