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두부가 고령화 사회에서 더 인기를 얻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있다. 일인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서 샐러드와 간편 과일과 더불어 두부류의 소비는 삼사 년 사이에 20% 이상 성장을 가져왔다는 기사를 읽으며 그녀는 잠시 즐거움과 걱정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는다. 앞으로 이런 추세라면 두부 제품이 증가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가 좋아하는 두부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과 두부 소비가 늘어나면 가격이 오르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어린 시절, 그녀는 신문지에 담아주는 콩나물 한 뭉치와 두부 한 모를 사러 엄마 심부름으로 동네 가게에 가곤 했다. 자그마한 가게 출입문 입구에 흰 천을 덮어쓴 두부는 그녀의 가족에게 인기 있는 반찬이었다. 운이 좋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라도 사게 되면 그냥 양념간장에 찍어 먹었고, 식은 두부는 프라이팬에 들기름 둘러서 노릇노릇하게 부쳐 먹었다. 두부 한 모는 그녀의 가족에게 맛있는 반찬이었다. 아무리 반찬이 없어도 두부 부침이면 족했다.
종종 두부 두 모를 사는 날이 있었는데, 그런 날은 눈치 보지 않고 두부를 실컷 먹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그녀가 사 온 두부를 도마에 놓고 칼로 나눌 때 두부가 혹시나 뭉개지지 않을까, 으스러지지 않을까, 살살 다루었다. 온 가족이 모여 밥상에 올라온 말캉말캉한 두부를 입속에 넣어 씹으면, 씹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도 그 맛을 알았다. 이미 그녀의 입속에서 이리저리 돌다가 식도로 넘어갈 때 고소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 시절 최고의 맛이었다.
방학이 되면, 그녀는 강원도 철원에 사는 이모네에 놀러 가곤 했다. 철원은 북한 땅이었다가 휴전선이 생기면서 남한 땅이 되었기에 북한이 고향인 이모와 이모부는 그곳에 정착하고 두부 공장을 했다. 두 분은 매일 두부를 만들었다. 새벽 두세 시면 두부 기계 돌아가고 사물과 사물이 부딪치는 소리와 사물과 사람이 뒤섞이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들리는 그 소리에는 냄새가 있었다. 콩 익는 냄새를 맡으며 맛있게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김이 폴폴 나는 두부가 공장에 가득했다. 아침마다 뜨끈한 두부를 실컷 먹었고 우유같이 보이기도 하는 흰색 콩물을 마셨다. 더구나 말랑말랑한 순두부를 먹을 때 그 부드러움을 무엇과 비교할까. 이렇게 두부를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이모네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정작 새벽부터 두부를 만들던 이모부를 아침에 종종 볼 수 없었다. 자전거 짐칸에 두부를 가득 싣고 배달하러 가신 이모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논밭길을, 비포장길을 이른 아침마다 매일 그렇게.
오십여 년 만에 그녀는 이모네, 그때 그 집을 다녀왔다. 두부 공장 자리에는 새집이 들어섰고 그녀가 잠을 자고 두부를 먹고 사촌들과 오목을 두고 묵찌빠 하며 놀던 집은 불에 타 사라졌다. 사라진 터에는 풀이 무성했다. 꽤 넓은 땅이지만, 그곳에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서 풀숲이 되었다. 이모네 집도 한동안 빈집으로 있다가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의 사촌이 그 집에 살고 있으나 그녀의 사촌도 농사를 지을 여력이 없다.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 사촌은 그녀처럼 노인이기 때문이다. 동네 토박이 다른 집들 대부분도 대처로 떠난 자녀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고 농사짓던 어른들은 거의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신다 해도 농사지을 힘이 없어 잡풀이 무성한 집이 꽤 있다.
지금은 그녀의 이모네 두부를 맛볼 수 없지만 변함없이 그 고소함으로 두부를 먹는다. 두부 반찬이면 힘이 난다. 필수아미노산, 단백질, 항암, 뇌 기능 향상, 골다공증 예방이라는 효능 때문이 아니다. 부서지기 쉬운 두부지만 언제 부서지더라도 그 변함없이 존재하는 고소함 때문이다. 두부는 그녀의 남은 삶을 고소함으로 책임져줄 에너지가 아닌가. 그러니 기운이 날 수밖에.
김치도 볶고, 두부도 데우고, 두부 넣은 김치전도 부치고, 양상추 위에 치즈 대신 으깬 두부로 장식한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 두부면도 있어서 볶음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 그녀는 생각한다. 출옥한 사람이 두부를 먹는 관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잘 모르지만, 부드럽고 고소한 두부는 아마도 앞으로 살아갈 날의 좋은 신호가 되기를 바라는 선한 마음의 징표가 아닐까. 그리고 두부의 재료인 콩은 싹을 틔우는 생명체이니, 두부를 먹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이 발아되기를 기원하는 의식이 아닐까. 어쩌면 콩을 불리고, 껍질을 벗기고, 갈고, 끓이고, 휘젓고, 형태를 만들기 위해 물을 빼는 복잡한 과정에서 딱 끊어서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유목하고 정착하는 인간에게 끓이고 응고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라고.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으로 사는 그녀는, 언제부턴가 점점 먹거리에 관심이 줄어든다. 생소한 퓨전 음식과 더불어 점점 많아지는 메뉴를 보면, 묘하게도 식욕이 힘을 잃는다. 늙으면 소화기능이 떨어져 식욕이 준다는 말의 의미를 알면서도 그녀만이 느끼는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한다. 너무나 많은 음식과 그 음식을 탐하는 풍경이 슬슬 지겨워지는 것도 그 이유다.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를 조율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를 고민하다 보면, 맛있는 음식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TV 프로그램에서 보게 되는 먹거리 영상이 오히려 불필요한 욕망을 끄집어내려는 안간힘으로 느껴져 속이 느물 느물 느끼해진다. 그러니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나지 않고 잘 먹지 않으니 체력이 거뜬하지 못하다. 이런 상황이 되면 두부도 그다지 그녀의 식욕을 돋지 못한다.
그럼에도 정작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려 있던 식욕을 살아나게 하는 음식은 역시 두부 요리다. 어느 지구촌에서는 콩으로 만든 치즈라고 부르며 영양가를 강조하는 두부, 어느 나라에서는 양고기라 부르며 고기처럼 먹었던 두부, 어느 도시에서는 도시를 대표하는 음식이 된 두부가 그녀에게 고마운 음식이다. 두부에 대한 유래가 다양하듯이, 두부 요리도 다양해지는 현상이 천만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더구나 앞으로 두부 소비가 늘어난다니, 두부 가격이 오를 걱정보다는 두부를 그 누구와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 기억과 시간의 톱니바퀴가 맞지 않아도 괜찮은 즐거움이다.
어린 시절에 먹었던 두부 맛을 기억하며 그녀가 웃으니, 두부도 웃는다. 그녀의 표정이 두부처럼 말랑말랑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