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문법에서 가정법 조건절처럼, ‘만약’이나 ‘만일’은 현재와 다른 상태를 상상하는 일이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 있고 행복 조건을 나열해서 자기 욕망을 투영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여자라면, 어린이라면, 어른이라면 등등, 질문의 조건은 상당히 다양하다. 아마도 가정법은 답을 기대하기보다 답과 상관없는 현실, 흔히 상상이라는 세계를 통해 현재의 고민을 나누고자 하는 희망으로 보인다. 또 누군가의 동의를 얻고 싶거나, 나와 다른 생각이라면 왜 그런지 궁금한 마음에서 나누는 화법이기도 하다. 적어도 자기 고민을 함께하고자 하는 연대의 메시지다. 메시지 전달은 여린 바람처럼 불기도 하지만 마음에 닿으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동이 된다. 비슷한 대답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질감이 되고 그 감정은 타인과 연결된 안도감이 되기도 하니까.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고민은 고민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자기 고민을 ‘만일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요'라고 누군가에게 물어본다면 그리 큰 고민은 아닐 것이다. 현실과는 다른 상황이나 가능성이 낮은 일, 소망을 가정하거나 상상해서 물어본다는 것은 고민을 객관화하려는 의지라는 것, 상대방 처지에서 새로 쓰이는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고 힘든 시기를 유예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별일이 아니기를 기대하다가 별일이 아닌, 믿지 못할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될 때가 있다. 사실, 미신적인 기대처럼 보이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고민을 나눌 때,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 데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기 고민이 고민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최면이거나, 고민의 중심에 서 있는 자기로부터 비켜서고 싶은 마음이 한아름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000이라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라고 묻고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자기 이야기를 편집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민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일 것이다.
살다 보면, '내가 만일'로 시작하는 시나리오쯤은 수십 편을 창작하게 된다. 시나리오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은 익숙하기도 하지만 생경하기도 하다. 돈과 권력과 사랑과 행복 그리고 장수를 꿈꾸던 전래동화 속의 인물처럼, 마법 세계에서나 가능한 시나리오 속의 나를 상상한다는 것은 분명히 흥미로운 일이다. 마치 영화처럼.
영화 「코블러(The Cobbler)」는 구두 수선공 이야기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영화가 많지만, 감동을 만나는 장면은 영화마다 다르다. 이 영화도 상상이 현실이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어느 날, 아들이 우연히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용했던 수선 기계로 수선한 신발 중, 275치수 신발을 신으면 신발 주인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모험은 시작된다. 구두 크기만 같으면 구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설정은 아들에게 매우 특별한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기회다. 아버지와 아들의 발 치수가 275이기 때문이다. 부자유친이랄까.
아들은 275치수 신발 수선이 들어오면 막강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감동적인 변신을 꿈꾸며, 여러 차례 망설임 끝에 여러 신발을 신게 된다. 그런데 세상일이 그렇게 감동적인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직접 체험하게 되니 생각이 많아진다. 어떤 신발을 신으면 악당이 되기도 하고 어떤 신발을 신으면 악당을 물리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애인이 있는 잘생긴 남자가 되기도 동성애자가 되기도 한다. 젊은이와 노인이 되면서 제각각의 고민과 걱정을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주인공은 ‘만일 여자라면’을 체험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275치수 신발을 신는 여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들은 변신 행위에서 누구나 말 못 할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말을 할 수 없는 고민이기에 누구도 알 수 없는 고민을 변신을 통해서 알게 되면서 아들은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을 더욱 갖게 된다. 자기 환경과 자기가 처한 고민은 대부분 사람이 겪는 고민과 별다르지 않지만, 손톱 밑의 가시라고 생각했던 자기만의 깊은 고민은 자기만이 겪어 내야 하는 애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결국 고민 나누기는 일종의 자신을 타자로 생각해 보는 일종의 변신 행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아들이 실종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노모에게 묻는다.
“아빠가 다시 돌아온다면 아빠와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네 아빠와 저녁 식사….”
아들은 아버지의 신발을 신고 아버지로 변신해 어머니와 저녁 식사를 한다. 생의 마지막을 부부가 함께하는 행복한 만찬은 사실, 아들과 노모와의 만찬이지만, 노모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와 슈트를 입은 아버지가 와인을 마시며 춤을 추는 만찬은 마법이다. 완벽한 노부부의 해후다. 며칠 후, 어머니는 자는 것처럼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간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자신의 발 크기만 한 마법의 신발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도 수선된 헌 신발로 말이다. 꿰매고 붙이고 갈고 다듬고 닦은 신발을 신고 살아가는 인생은 시시때때로 힘든 시기를 수선해 가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지금이라는 시대를 함께 고민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이 마법이리라.
마법의 시간을 기다린다. 275치수여도 상관없고 250이나 175도 상관없다. 자기만의 마법을 주문하는 것은 누구에게 공평하니까. 누구는 265, 누구는 240, 누구는 ….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머리 아픈 시간을 유예하면서도 현실을 직면하는 용기가 있으니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구두 수선공 코블러에게 수선된 헌 신발 하나 빌려볼까요?”라고 대답해도 좋을 듯싶다.
남의 입장을 생각한다는 것이 역시 쉽지 않기에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영화로 접하면서 가끔 마법을 꿈꾼다. 모두가 겪고 있는 제각각의 고민이 어떤 집합체를 이루며 몰려다니면 엄청 슬프기 때문이다. 따로, 또 같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군중의 고독 같은 것이므로. 혼자서 고민을 수선하는 것이 너무 힘들 때,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은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