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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둥

[계룡수필] 원고

by 남쪽맑은물

서랍에서 정사각형 봉투가 손에 걸린다. 어라? 이것이 여기에 있었네…. 여분으로 남겨 둔 기타 줄이다. 참 오랫동안 기타를 치지 않았다.


외롭고 지루하던 날들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유일하게 오락이 될 수 있는 일인, 수다조차 심드렁하던 날들. 듬성듬성 이미 모여 있는 사람들 틈에 합류하는 일이 서툴던 날들. 웃고 떠드는 일과는 결이 조금 다른, 시간 공백 넓이만큼 내면에 꿈틀대는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날들.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개인 취향과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모르지 않기에 그 누군가와 나누는 이야기가 절실했던 날들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바쁜 것과 상관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 날들임에도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갈 상황이나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을 데리고 다니는지, 지루한 마음은 휴식도 없는지, 결정권 없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가득한 앙앙불락의 시간은 맥없이 소진되었다.

모든 일이 시들해지고 베란다에서 거리풍경 보는 것도 그냥저냥 할 때 정물처럼 한동안 책장 옆에 있던 기타가 보였다. 기타를 튕겨 보았다. 여섯 줄에서 튕겨 나오는 제각각의 소리 조합은 우줄우줄하게 공간을 맴돌았다. 방안 테이블 아래로 흐르다, 의자 다리를 휘휘 돌다가, 책장에 있는 책으로 여유작작 다가가기를 반복했다.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날까. 불협화음조차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호방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아닌, 개구리가 떼 지어 우는 소리가 아닌, 술 취해 내뱉는 불분명한 소리가 아닌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같은 청량한 목소리를.

두두둥, 여섯 줄이 시차를 두고 울릴 때, 방 안에서 숨을 죽이거나 사물사물 움직이고 있는 작은 먼지조차 기타 소리에 반응하는 감각이 맴돌았다. 다양한 소리를 내는 기타 몸체의 공명. 그 소리가 공기 중으로 퍼질 때 외로움으로 불안정했던 상념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기타 소리는 풍부한 상상력이었다. 왼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오른손 움직임으로 탄생하는 소리는 단절된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먹먹한 종소리 같다고 할까. 신음 같기도 한,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기도 소리처럼 들렸다. 멀리 있는 듯 가까운, 눈을 가려도 들리는, 결코 박제될 수 없는 소리가 유의변전한 삶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했다. 샘에서 솟는 물소리처럼, 마치 누군가의 정갈한 목소리처럼 들렸다.

현을 튕겨서 소리 내는 악기의 특성은 특별한 의도 없이 나오는 웃음 같았다. 굵기가 다른 여섯 개의 기타 줄. 각기 저음과 고음 사이에서 숨기척이라도 찾아내는 저마다 다른 울림이 마음에 담쏙 안기는 평화와 비슷한 것들이었다. 여섯 줄에서 듣기 좋은 소리가 나는 것은 상황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마음 같았다. 줄이 느슨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고 팽팽하면 줄이 끊어지듯이, 민감한 감각을 지닌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긴장이 섬세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기타와의 완급조절은 허세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아서 좋았다. 자세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친밀감 같은 것. 그 느낌을 손가락 움직임과 손끝 압력과 손톱 감각이 이미 알아챘다.

두 팔로 기타를 품에 안고 양 손가락을 이용해야 소리가 나고 기타와 서로 기대어야 좋은 소리를 낸다. 왼손으로 줄을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면 여섯 줄의 울림이 울림통에 들어가 몇 바퀴를 돈 다음 화음을 뱉는다. 기타 몸체에 조금만 금이 가도 모래주머니 만지는 소리가 난다. 굵은 줄처럼 가라앉아 있는 허무한 일상, 중간 줄처럼 어정쩡하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유부단함, 가는 줄처럼 남보다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아킬레스건이 울림통에 들어가 화음이 된다. 왼손과 오른손의 조화, 가슴에 안겨 울리는 기타는 사람 마음을 품게 한다.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낯선 곳에서의 흐리터분한 생활은 식구가 늘어남으로 달라졌다. 소설책 읽는 일이 아이에게 그림책 읽어주는 일상으로 바뀌었다. 베란다에서 무연히 거리풍경을 보는 일이 아이 옷을 널고 거두어들이는 날로 달라졌다. 아이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는 내 마음에 있는 울림통에서 화음이 되었다. 그때, 종종 치던 기타는 허공에 빨려 들어가는 감성을 느끼게 했고, 흐르고 있는 시간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기타 소리는 작은 눈으로 웃고 큰 입으로 웃는 웃음이었다. 코를 실룩거리며 어렴풋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웃음에 빛이 있다면, 아마 그 빛은 잔잔하게 번지는 따뜻함이었을 것이다. 기타는 특별한 의도 없이 따뜻할 수 있는 웃음이었고 골짜기와 등성이를 오르내리는 삶의 여정에서 흔들림을 잡아주는 손이었다.

공연을 보았다. 기타 하나로 인생을 노래했던 가수들도 나이가 들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타는 예전보다 훨씬 좋은 것이겠지만, 그들 음악은 예전 같지 않았다. 성량도 약하고 목소리에 힘도 부족했다. 그러나 나의 외롭고 지루한 지난날 기억이 가수의 약한 성량처럼, 삶의 깜부기불처럼, 반짝반짝했다. 음향기기를 타고 울리는 기타 소리는 지난 이야기를 데리고 불꽃처럼 둥실둥실 공연장을 떠돌아다녔다. 그동안 누워있던 생각이 차차 선명해지며 활개를 쳤다. 깊은 무력감일지라도 살아있는 생명에게 누워있는 생각에서 깨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 기타를 연주하는 가수의 손가락에서 우울하고 무기력한 현실을 털고 일어나는 어렴풋한 힘이 느껴졌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명주실을 튕기듯, 기타를 튕기는 힘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여섯 개 기타 줄을 조율해서 만날 이야기를 생각한다. 늘펀하게 누워있던 생각이 마음에서 메아리친다. 그 증폭이 점점 빨라진다. 그 속도가 가량맞을지라도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맘껏 풀어놓을 것이다. 기타 위에 살포시 쌓인 먼지를 쓸어버리고 지난 이야기를 여섯 줄 서사로 얼크러지게 할 것이다. 그러면 나의 기타 이야기는 내가 있는 공간을 가득 채울 것이다. 비록 서툰 음의 진동이라 해도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환상과 현실 감각이 녹아 있는 웃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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