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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사랑 May 22. 2021

다정한 우리의 뒷 산

잘 자라 아이야

첫째는 빛이 주는 자극에 예민하다. 햇빛이 쨍한 날이면 괴로운 듯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눈을 가린다. 오후가 되어 간판에 불이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그것 역시 아이에게 강한 자극이 되는 듯하다. 심지어 마트나 키즈카페의 형광등 불빛도 그렇다. 과하게 흥분했다 싶은 날엔 새벽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다.


첫째의 안정적인 수면을 위해 우리는 오후 4시 이후엔 TV를 켜지 않고, 오후엔 마트와 키즈카페에 가지 않기 시작했다. 규칙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수면에 방해가 되는 과자와 음료수는 금지. 오후 6시 이후 너무 신나는 놀이 금지.

그런데 자극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첫째는 일정 시간 바깥활동을 꼭 해야 다. 하루인데 뭐, 하고 조금 덜 놀거나 외출을 하지 않으면 바로 문제가 생겼다. 규칙은 또 늘어났다. 일정한 생활 루틴 지키기. 매일 충분히 바깥놀이 하기.

여름이나 겨울이 다가오면 두려웠다. 체온 조절이 잘 안 되기 때문이. 추워서 또 더워서 새벽에 깨서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아이가 안타깝다.


이렇듯 첫째의 일상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 많다.

햇빛이 내리쬐는 시간을 피해 늦은 오후에 외출을 했는데 골목을 벗어나면 가게들의 간판이 반짝인다. 간판이 보이면 돌아서 다시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날씨가 궂으면 놀이터에 나갈 수가 없어 키즈카페를 간다. 오전인데도 실내놀이터의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반짝인다. 찜찜했지만 이왕 들어온 것 운동량 채우며 재미있게 잘 놀고 집에 간다. 아니나 다를까 첫째가 새벽에 소리를 지른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매일 일정 시간 바깥활동을 해야 하는데 아이와 갈만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실내가 아닐 것. 아이가 몸을 쓰며 걸을 수 있게 경사가 있는 비포장 상태일 것. 자극을 피하기 위해 인공적인 소리나 불빛이 없을 것. 그늘이 있을 것.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 우리가 찾은 최적의 외출 장소가 바로 우리 집 뒷산이다.


집에서 5분만 걸으면 산 입구이다. 습하고 벌레가 많고 깨끗한 화장실과 카페가 없어서 산은 내가 선호하는 장소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산에 가면 첫째는 자유롭다.

마음껏 뛰고 주저앉아 손으로 흙과 낙엽을 문지른다. 나뭇가지를 쥐어들고 신나게 흔들고 내키면 땅에 선을 그어댄다. 제자리 점프를 하거나 소리를 질러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처음 산에 오를 때는 팔이 빠져라 당겨야 첫째가 걸음을 떼었다. 버팅기는 아이와 씨름하며 숙제하듯 한 바퀴 휘~ 돌고 오면 겨우 한 시간이 지났다.

울퉁불퉁한 흙길에서 자꾸 넘어지고, 돌계단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리는 첫째에게 화를 많이 냈다. 야트막하다 해도 오르막이 있으면 첫째는 꼭 뒤돌아서서 도망가려 했다. , 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을 보면 아래로 뛰어내리려 해서 아이를 꼭 잡고 긴장하며 산을 다녀야 했다.


비와 눈이 오는 날에는 흙이 질어지니 산으로 올라가기 어려웠다. 비옷을 입고 산 주변과 입구를 최대한 돌아서 걸었다. 다행히 산 옆에 작은 공원이 생겨 산책코스가 길어졌다. 물웅덩이마다 뛰어들어 물을 튀기고, 아무도 없는 공원 놀이터에서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마음껏 미끄럼틀과 그네를 탔다.


 못 자는 고통에 비하면 옷을 버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손과 얼굴이 까매져도 씻으면 그만이다.  

평안한 밤을 바라며 어디든 나가야만 하는 첫째와 우리 가족에게 산은 언제나 친절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 가족에게 '아이야 오늘은 잘 자라, 부디 푹 자거라' 하며 다정하게 마중하는 것 같았다. 


산에 다닌 지 4년이 지났다. 아이의 수면은 아직 불안정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원인과 해결법을 예전보다 빠르게 찾게 되었다.

숲을 걸으며 의도치 않게 얻은 것이 많다. 산길을 걷다 보니 첫째의 등이 조금 펴지고 땅에만 머무르던 시선이 가끔씩 앞을, 꽃과 나무를 또 하늘을 향하게 되었다.

2~3년 동안은 산 입구만 한 바퀴 돌았는데 이제 산을 오른다. 손을 꼭 쥐고 걸어야 하지만 날만 괜찮으면 제법 수월하게 걷는다.

늘 그렇듯 오래 걸리기야 하겠지만, 언젠가는 아이의 뒤에서 여유롭게 나무와 꽃을 보며 제대로 된 등산을 하는 날도 오겠지. 고마운 우리 집 뒷 산 덕분에 우리는 다시 희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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