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시험날이 임박해서야 어쩔 수 없이 하곤 했지만, 수목학은 달랐다. 시험 뒤에도 이런저런 도감을 사들여 이름과 학명을 외웠고, 실물을 만나러 수목원에 드나들었다. 한 종 한 종, 그 이름을 알아가는 순간들은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나무를 알아가며 얻은 기쁨은 자연스럽게, 여러 나무를 마음껏 심고 싶은 생각으로, 그리고 나무를 심어 공간을 만드는 조경가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작은 조경설계사무소에 입사하며, 내가 좋아하는 나무에 관련된 이 일을 하면 행복할 거라고, 반드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는 채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회사, 오래 못 다니셨네요?” 퇴사 이후 보았던 면접관이 이력서를 살피며 던진 질문이 생각난다. '조경설계회사 7개월 근무'라고 적어둔 이력서가 면접관에게 보여준 나는 사회 부적응자였을까? 아니면 무능력자? 취직 전에 쉽게 구해하던 일과 비슷한 자리도 연거푸 거절당했다. 아마 회사에서 보낸 시간은 면접관에게는 짧아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7개월은 새카맣게 떨어지는 벼랑에 내 뒤꿈치가 닿을 때까지 내몰리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그 검은 낭떠러지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그 직장을 포기했다.
그저 나무가 좋아서 발들였던 그곳에서의 7개월. 그 시간 동안 겪은 차갑고 뾰족한 일들은 퇴사 후에도 나를 오래도록 찌르고 후벼댔다. 그리고 피나고 멍든 만큼 많은 것이 미워졌다. 그 회사에 제출했던 포트폴리오와 그 속의 프로젝트들, 조경가를 꿈꾸며 공부했던 과 건물, 전공 책으로 빼곡한 책장...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길로 나를 이끌었던 나무. 나무가 가장 미웠다. 우울한 몸을 간신히 문 밖으로 끌고 나오면, 나무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햇살 속에서 살랑였다. 그 모습이 무심코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스스로 그런 내 모습이 한심했다. “너, 나무 관련된 일이라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잖아.” 나는 나무를 피해서, 바닥을 보며 다닐 수밖에 없었다.
늘 바닥을 보며 걸었던 그때, 눈에 들어왔던 건 보도블록 틈새에 자라난, 소위 잡초라고 부르는 풀들이었다. 조경회사에서 심지 않아도 어디에나 뿌리를 내리고 풍경의 일부를 차지하는 작은 식물들. 땅빈대, 별꽃, 질경이, 제비꽃, 강아지풀, 석류풀... 이 식물들의 이름을 알아가는 일은, 수목원에서 나무 이름을 공부하던 일과 달랐다. 누구도 긴히 쓰는 식물이 아니니, 나는 이들을 심어 가꾸거나, 그런 일을 하는 직업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 식물들은 무용*해서, 어떤 길도, 어떤 낭떠러지도 보여주지 않았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잡초의 이름을 헤아리며 여러 계절과 작별한 뒤, 다시 나무 앞에 섰던 날이 기억난다. 학생 시절 공부한 기억을 꺼내어 이름을 부르자, 기쁘고 반가운 마음과 함께 벼랑으로 내몰리던 날들도 함께 떠올랐다. 이 날들을 잊는다면,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나무를 좋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력서에 슬쩍 지워도 될 회사 생활 7개월 경력을 굳이 적어 넣었던 것처럼, 새카만 낭떠러지에 서 있던 그날들을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나무는 그저 무용해서 사랑스러운 작은 풀들과 다르다. 때론 지난 일들에 눈물을 짓지만 그보다 자주 도감을 들고 수목원을 찾는 것. 내가 나무를 좋아하는 방식이다.
* 엄밀한 의미에서 식용, 약용, 관상용 등으로 쓸 수는 있으나,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