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 써라
2024.2.29.
by
친절한 James
Feb 29. 2024
"와, 엄청난데?"
"그니까, 장난 아니다."
가파른 오르막길 끝에 다다른 작은 평지.
아직 오지 않은 첫눈을 닮은,
눈부신 하얀 은빛 머릿결.
바람결 따라 몸서리치는 억새 물결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한껏 적셨다.
탁 트인 풍경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저 멀리 희끄무레한 바다가 아릿하고
머리 위 새초롬한 구름이 아장거렸다.
그들은 삼삼오오 사진 찍는 무리를 지나
배경이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찾았다.
"여기 어때?"
"오, 괜찮다. 사진 찍을까?"
그는 옆으로 맨 기다란 가방에서
스마트폰 삼각대를 꺼내
능숙한 솜씨로 위치와 구도를 잡았다.
"자, 이쪽에서 사진 찍자."
눈물이 여물고 콧물이 영글었다.
볼 빨간 청춘들의 웃음이 찰칵, 반짝였다.
사진만 보면 너무나 평화로워 보여.
오오오, 바람이 진짜 세게 분다.
으으으, 빨리 내려가자. 춥다.
아아아, 이건 얼음으로 만든
이태리타월로 몸을 씻는 기분이야.
새큰새큰하고 저릿저릿했다.
차가운 공기가 살결을 두드리다
몸의 온기를 빼앗아 달아났다.
"패딩을 입어도 춥네."
"바람이 엄청나서 그래.
겨울 제주도는 처음인데 참 화끈하네."
"그래도 오름 오니까 좋지?"
"그래, 햇볕이 났음 더 좋았을 텐데
뭐, 이것도 괜찮네."
"나랑 함께 있으니까 그렇지."
"맞아, 같이 있으면 뭐든 좋지."
두 사람은 발길을 서둘렀다.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했다.
아메리카노도 좋고
아인슈페너도 괜찮아.
아, 어느덧 오름 밑동에서
아까 올라갔던
언덕을 올려다봤다.
와, 꽤 높다. 그지?
그러게, 우리 저기서 내려온 거야?
두 사람은 그냥 가기 아쉬워
사진을 조금 더 찍기로 했다.
노르스름 잘 익은 오름을 배경으로
주차장 옆 공터에 삼각대를 세우고
짐벌과 연동된 앱을 켰다.
이번엔 연속 촬영을 해볼까.
스마트폰이 조금씩 돌아가며
스냅숏을 담았다.
그들은 갖가지 재미난 표정과 몸짓으로
12월 제주도의 풍경을 간직했다.
추위는 잊고
리허설하며 크크크,
사진을 보고 깔깔깔,
그래, 즐거운 시간이었다.
살아있다는 것,
살아 숨 쉰다는 것,
어쩌면 그건 이런 게 아닐까.
살다 보면 많은 일이 생길 테야.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게 어떤 것이든,
앞으로 어떤 것이 펼쳐지든,
지금처럼 우리는 함께 할 것이고
무엇이든 감내하고 감응하며,
그리고 감사하며 살아갈 거야.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슬슬 배가 고프다.
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두 사람 뒤로 구름을 가르는
비스듬한 햇살이
발길에 닿아
반짝거렸다.
keyword
바람
풍경
제주도
Brunch Book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연재
365일 작가연습 프로젝트 3
19
'다리를 건너면서…'
20
그것은 일장춘몽이었다
21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 써라
22
'침을 바른 새빨간 입술'(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23
한밤중 듣는 블루스 곡
전체 목차 보기
이전 20화
그것은 일장춘몽이었다
'침을 바른 새빨간 입술'(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다음 2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