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각 오후 4시 33분. 퇴근시간 7분 전, 버스 도착 5분 전이다. 경순은 아직 퇴근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이미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겼다. 4분 안에 버스정류장까지 가야 집에 가는 61번 버스를 탈 수 있다. 이 버스를 놓치면 족히 15분은 기다려야 다음 버스를 탈 수 있고, 그러면 소사역 까지 가는 전철을 놓쳐 또 20분을 기다려야 한다.
경순은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경순이 5분 쯤 이르게 퇴근을 한다 해서 눈치를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속으로 뒷얘기를 할지언정 경순 앞에서 대놓고 말할 사람은 흔치 않다는 것을 경순은 잘 알고 있다. 일찍 나선 덕에 오늘도 성공적으로 버스를 탔다. 마침 자리가 있어 전철역까지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역시 일찍 나와야 자리에 앉는다.
아파트 단지로 둘러쌓인 이 작은 초등학교에 경순은 4년 전 교장으로 승진발령 받았다. 학교가 집에서 좀 먼 것이 유일한 문제였지만 경순보다 앞서 교장으로 승진한 남편이 출퇴근을 책임져주겠다고 했다. 운 좋게 남편보다 경순의 학교가 집에서 더 가까웠다. 남편이 출근길에 경순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퇴근하며 태워오면 됐다. 서로의 회식이 있을 경우에는 다행히 근처 아파트에 사는 5학년 부장의 차를 얻어 타서 그동안 불편함 없이 다녔다. ‘시흥은 다 좋은데 교통이 불편해. 내년에는 광명으로 옮겨야하나.’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내려앉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요즘엔 자주 못 뵙네요.”
퇴근 시간 7분 전, 현관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는 경순에게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돌아보니 9월에 발령 받은 신규교사다. 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교실 정리를 끝내고 쓰레기 버리러 내려온 모양이었다.
“어, 어. 신 선생님, 그러게 반가워요. 요즘 바쁜가보네요. 먼저 퇴근합니다, 다음에 봅시다.”
여기서 대화를 나누다 늦어지면 버스를 놓친다. 인사를 마친 경순은 서둘러 현관을 나섰고 그런 경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신 선생 얼굴에는 조심스레 안도의 표정이 퍼져나갔다.
“요즘 교장선생님 때문에 진짜 불편해 죽겠어요. 왜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시냐고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면 어색하고, 같은 버스타고 전철역까지 가면 걸어가면서도 계속 신경 쓰인단 말예요. 매일 피하느라 얼마나 눈치작전인지 몰라요.”
“왜, 우리 교장선생님 얼마나 소탈하고 좋으셔. 그냥 같이 수다 좀 떨어드려.”
“부장님! 그게 어디 쉬워요. 이래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으면 운전을 해야 해요. 밑에 사람이 얼마나 불편한데요. 어제도 교장선생님이랑 마주치기 싫어서 한 정거장 걸어가서 탔다고요.”
“그러니까, 남편 분은 퇴직하셨으면 와이프 출퇴근 좀 해주면 좋을텐데. 학교도 먼 데 좀 태워주시지. 나 같으면 퇴직하고 할 일도 없는데 돈 벌어오는 와이프 만날 태워다주겠다.”
쓰레기를 버리고 교실로 올라간 3학년 3반 신 선생과 옆 반 부장의 대화는 퇴근 시간을 넘겨도 끊어질 줄 몰랐다.
학교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줄도 모르고 버스에 올라탄 경순은 조금 전에 만난 신규교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요즘 젊은 교사들은 참 싹싹하단말야, 나 때는 교장이 어려워서 고개도 못들었는데. 인사도 넙죽 잘 하고 말도 잘 붙인다니까. 신규인데 수업도 잘 하고 학급경영도 야무지다고 부장회의 시간에 3학년 부장이 칭찬을 많이 하더라니.' 퇴근 시간에 종종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신 선생이 요즘은 보이지 않는 것이 학교 일 때문에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한 경순은, 내일 출근길에 만나면 커피라도 한 잔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전철역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