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꼭 엄마가 되어보고 싶어. 네가 정말로 아이 생각이 없다면 이혼해. 더 늦기 전에 다른 남자 만나서 아이 가질 거야. -
불 꺼진 집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쪽지를 확인하자마자 은혁은 당장 병원부터 예약했다. 요즘 제일 유명하다고 은희가 두 달 넘게 팸플릿을 보여주며 같이 가자고 조르던 난임 전문 병원이었다. 예약이 꽉 차 있어 간신히 6개월 뒤로 진료 날짜를 잡았지만, 언제든 달려갈 수 있으니 취소되는 시간이 있으면 꼭 연락해달라고 사정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예약을 마친 은혁은 바로 처제가 살고 있는 부천으로 차를 몰았다. 쪽지만 남기고 집을 나간 은희는 세상에서 완전 사라지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다. 전화기는 꺼져있고 모든 메신저는 수신 거부, 차단 상태로 바꿔 놨다. 하루에 한 번씩 꼭 피드를 올리던 인스타도 비공개로 돌려놨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도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생생히 느껴져서 오히려 찾아달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처제도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처제 부부는 부천 중심가 아파트 상가에서 요즘 유행하는 저가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다. 은희는 분명 거기 앉아 있을 것이다. 커다란 컵 가득 담긴 사약같이 쓴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마리아 병원, 6개월 뒤로 예약 잡았다. 내일은 네가 가던 한의원 가서 진맥도 하고 약도 지으려고.”
은혁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쏟아냈다.
“검사해야 하는 거 있으면 미리 말해줘. 회사에 연차 낼게. 한약은 너도 같이 지어먹자.”
“엄마한테는 내가 말할테니까 너는 그냥 처제네 집에서 며칠 쉬다 와.”
“저녁은 처제랑 같이 감자탕 먹을까?”
“은희야, 대답 좀 해.”
숨을 헐떡이며 말하는 은혁을 알은 체 않고 은희는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꼿꼿하게 세운 허리를 더 바로 세우고. 커피를 마시는 은희를 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던 은혁은 오늘 아무 것도 입에 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이 몇 시더라. 시간이 자신을 빗겨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을 좀 차릴 필요가 있었다. 대답 없는 은희를 두고 일어서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물을 가지러 잠시 일어섰다. 물이라도 한 컵 마셔야했다.
“왜 왔어?”
자리로 돌아온 은혁이 차가운 물 한 컵을 다 마셨을 때, 은희가 물었다.
“왜 왔긴, 너랑 같이 지지고 볶으면서 자식 키우려고 왔지.”
“진심이야?”
“은희야, 너도 알잖아. 우리 엄마, 나 때문에 이혼 못하고 아버지랑 살면서 평생 불행했다는 거. 그 꼴 보기 싫었고, 나도 그렇게 될까 무서워한 거, 그래서 아이 갖기 싫어한 거. 근데, 괜찮아. 네가 그렇게 아이 갖고 싶으면 낳으면 되지, 아이 갖자. 그래, 아들이건 딸이건 그게 뭐 힘들어. 걱정 마. 나 할 수 있어. 알잖아, 나 밤일도 잘하는 거. 연하남편 뒀다 뭐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은희 앞으로 내밀며 은혁이 웃었다. 실없는 소리를 해서라도 굳어진 은희 얼굴을 풀어주고 싶었는데,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로 기분만 더 상하게 만들었을까? 여전히 말 없는 은희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는 게 힘들었다. 몸속의 수분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한 컵 더 떠오려고 일어서는 순간, 은희가 은혁을 돌아봤다.
“정말 아빠가 될 수 있겠어?”
“......”
대답해야한다, ‘응’이라고 말해야한다. 머릿속에서 이미 대답이 출력됐는데, 입에서 오류가 난 것 같았다. 은혁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은희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려 자신이 아빠가 된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잠깐의 머뭇거림을 은희는 놓치지 않았다.
“됐어, 무리하지 마. 너는 절대로 내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지 못 할 거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은희가 말했다.
“은주네 집에 며칠 있을 거야. 걱정 마. 전화는 켜둘게.”
먼저 일어나는 은희를 은혁은 잡지 못했다. 돌아보지도 못했다. 은희가 남기고 간 빈 커피 잔을 멍하니 바라보며 마치 은희 목소리 같은 색이라고 생각했다. 어둡고 복잡하지만 또 어딘가 맑은. 그 목소리가 은혁의 몸 속으로 계속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좋은 아빠. 좋은 아빠. 좋은 아빠. 좋은 아빠. 은희가 남긴 진한 아메리카노 색처럼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렇게 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