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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무서운 얘기 해주세요!

by 피어라

비가 온다. 10월인데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방금 일어나 아직 잠도 덜깼는데, 창밖을 보고 비가 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서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는 것을 보니 지나가는 비 같지 않다. '어젯밤에 일기예보를 확인해볼껄', 서영은 작은 후회를 하며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쳤다.


버스 안은 붐볐지만, 다행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앉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급히 검색에 들어갔다. 검색포털에 먼저 '무서운 얘기'를 넣고 검색해봤다. 전교 1등이던 아이가 질투해서 옥상에서 밀어버린 이야기나 빨간 마스크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이미 다 아는 얘기들이었다. 심지어 서영이 십몇 년 전에 울궈먹던 얘기도 있었다. 이번엔 인스타에서 검색을 해봤다. 생각보다 많은 얘기들이 나왔다. 하나씩 엄지손가락으로 밀어가며 살펴보는 사이, 학교 앞 정거장에 도착했다. 급히 카드를 찍고 내리자 나올 때 보다 빗발이 더 굵어져있었다.


비가 오는 날마다 서영의 반 아이들은 무서운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아니, 으레 무서운 얘기를 듣는 날인 줄 안다. 차가운 봄비가 내리던 4월 어느날, 처진 분위기를 환기해줄 목적으로 5교시에 처음 들려준 게 시작이었다. 비오는 날 잠깐의 이벤트로 그칠 줄 알았던 무서운 이야기는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약속아닌 약속이 되어 지켜오고 있었다. 여름내내, 아이들은 비가 오면 비가 오니 으스스한 얘기를 해달라고 했고, 무더우면 무더운대로 날이 더우니 오싹해지게 무서운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이러다 너희들 한 겨울에도 무서운 얘기 해달라고 조르겠다?" 서영이 짐짓 화난 표정으로 말을 해도 아이들은 큰 소리로 "겨울에도 해주세요!"라고 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그때마다 서영은 교직경력 동안 울궈먹고 울궈먹은 얘기들을 총 동원해 무섭게 각색해 들려줬고,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다 털었다. 이젠 이야기주머니가 떨어졌는지 더이상 쥐어짜도 나올 얘기가 없었다. 다행히 인터넷 검색으로 몇 번의 비오는 날을 무사히 넘겼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무서운 이야기 찾기는 더 없을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아침부터 비라니. 분명 오늘도 저 열두 살 짜리 짹짹이들은 입을 모아 서영을 향해 '무서운 얘기' 합창을 해댈터였다. 서영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무시하고 그냥 수업을 진행하는 수고보다 얼른 검색해서 하나라도 들려주고 끝내는게 몸도 마음도 편할 거라는걸 알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부팅이 되는 동안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부터 한 잔을 타서 자리에 앉았다. 아직 아이들이 오기까지 십여 분이 남았다. 서영은 교사커뮤니티에 들어가 무서운 이야기로 검색했다. 성공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올라와있었다. 뜨거운 커피를 식히는 동안 서영은 급히 게시글을 읽어내려갔다. '대박, 이거 괜찮은데!' 누를 수 있다면 좋아요를 10번도 더 누르고 싶다고 생각하며 서영은 잊어버리지 않게 급히 출력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오기 전 준비가 끝났다. 그제야 서영은 메신저와 대화창을 확인하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니나다를까, 아이들은 아침 독서시간이 끝나자마자 서영을 향해 무서운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두 명의 목소리였는데, 어느새 27명 모두가 애절한 눈빛으로 서영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교과수업시작을 늦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서영은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들을 먼저 둘러본 후, 창 밖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순간, 27명의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을 죽였다.



- 이거, 진짜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 남편이 겪은 일이야. 선생님 남편이 대학생 때 였어. 하루는 친구들하고 술을 마신거야.


- 에, 선생님 남편도 술 마셔요?

- 야아, 조용히 해.

- 좀 듣자!


- 그럼, 선생님도 술 마시지. 선생님 남편도 마시고. 아무튼 들어봐. 그때 선생님 남편이 술을 엄청 마신거야. 많이 취해서 도저히 집에 갈 수가 없겠더래. 그래서 친구네 집에 같이 가서 자게 됐어. 친구 방 침대에 먼저 누웠는데 슬슬 잠이 오더래. 눈이 감기고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문이 스르르 열리더래.


- 꺄악!

- 이게 뭐가 무섭다고 소릴 질러!

- 네 소리가 더 무섭잖아!


- 얘들아 들어봐, 진짜 무서운 얘기란 말야, 떠들면 얘기 안한다!

- 아녜요, 선생님! 얼른 해주세요!


서영은 제일 떠들던 아이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오더라는거야. 친구인가 싶어서 눈을 뜨려고 하는데 뭐가 몸을 누른거 같이 무거워서 눈이 안떠지더래. 근데 사람의 기척이 다가오더니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더라나? 그래서 간신히 힘을 쥐어짜네서 눈을 떴는데, 나가는 뒷모습 밖에 못봤대. 굉장히 마른 체형에 빨간 원피스를 입고 긴머리를 한 여자의 뒷모습. 아, 친구네 여동생이나 누나인가보다. 들어와서 이불 챙겨주고 가는구나, 안심이 되어서 그때부터 푹 자고 일어났대.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어. 친구가 깨워서 아침밥 먹으라고 불렀대. 나가보니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과 뜨끈한 국을 친구 엄마가 차려주신거야. '잘 먹겠습니다'인사하고 밥상에 앉았는데, 친구엄마, 친구, 우리 남편 밖에 없네? '어, 어머니 여동생은 아침 안 먹나요?'하고 남편이 물었지. 어젯밤에 본 여자가 동생이라고 생각한거야. '응? 나 외동인데? 무슨 여동생?'


와, 선생님 지금 소름 돋았다. 이거 봐봐, 팔에 소름 돋은거, 보이지? 그 집에 여자는 친구 엄마 밖에 안 산다는거야! 분명 어젯밤에 빨간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한 마른 여자를 봤는데도! 남편은 자기가 잘못 봤나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아침에 본 엄마 모습은 뚱뚱하고 짧은 퍼머 머리였어. 그러니까, 엄마는 절대로 아니었다는거야.


어떻게 된 걸까? 사실 여기엔 말 못할 사연이 있었던거야. 그건 바로...... .


서영은 여기까지 말하고 말꼬리를 길게 끌며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두었다. 교실에 정적이 깔리고 서영은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었다. 그리고 흥겨운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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