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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 - 천사들의 해변

by 피어라
KakaoTalk_20231202_171621599.jpg 니스 - 천사들의 해변 / 라울 뒤피

2023년 11월 26일 일요일 오후 4시, 나는 니스의 해변가에 갈색 양산을 들고 서 있었다. 오래전 헤어진 옛 연인이자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친구와 이 곳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마흔이 훌쩍 넘어 처음 떠난 해외 여행, 낯선 나라 프랑스, 낯선 도시 니스의 한인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를 만날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는 각자의 여행을 마치고 마지막 날인 오늘, 이곳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고 나는 두 시간이나 일찍 이 곳에 도착해서 그를 기다린다. 바다는 잔잔하고, 짙다. 바람은 선선하고, 하늘이 푸르다. 길게 쭉 뻗은 야자수 나무 그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내 눈 속으로 해안가 새빨간 지붕들이 통통튀며 뛰어들어온다.


파란 바다가 주홍빛으로 물들어가고 빨간 지붕대신 노란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야자수 밑에서 바다만 바라봤다. 3일 전 저녁, 니스 외곽의 작은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공용주방에서 맥주를 마시던 그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를 한 눈에 알아봤다. 놀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인사도 못하고 당황해하는 나를 보고 먼저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캐리어를 들어줬다. 그리고 잘 지냈느냐고, 많이 늙었다고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30년 전의 얼굴과 똑같아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어딘가에서 뛰쳐나와 생생하게 되살려 내서, 적절한 대꾸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 밤, 긴 비행시간으로 피곤해서 곯아떨어질거라 생각했지만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곤한 얼굴로 일어나 커피를 마시러 내려간 주방냉장고에 단정한 한글로 메모가 붙어있었다.

'3일 뒤에 니스로 돌아오는데, 그때 저녁 같이 먹지 않을래요? 6시 00000로 올 수 있으면 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가 왜, 어째서, 무슨 일로 니스에 있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지금은 다른 도시로 갔는 지 이 곳을 여행중인지, 아니, 출장중인지 어떤 지도 모른다. 아니, 왜 저녁을 먹자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끼리 반가운 마음의 표현? 여행지에서의 저지르는 중년의 일탈? 그저 오랜만에 본 옛 인연에 대한 인사? 짐작도 할 수 없지만 내 심장은 막 움직이기 시작한 메트로놈처럼 저절로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눈치없이 3일 내내.


'예전 모습 그대로, 멋있게 나이들었더라.'

계속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드디어 해가 지기 시작했다. 펍으로 걸어가며 길에 어쩐지 도망치고 싶어졌다. 늙고 살찐 아줌마를, 오래 전에 잠시 사랑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여자를 도대체 왜 따로 보자고 한 걸까. 만나자고 했지만 진짜 그가 나올지 아닐지 모른다. 심지어 그는 메모에 연락처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그런데도 귓가에 요동치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약속장소로 가고 있는 이유는 그저 한 번 만나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나 들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어린 날 쿨하게 헤어지고 난 다음에 혼자 아파했던 억울함보다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있는지 알고 싶다는 인간적인 호기심이 더 컸던거다.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있는지, 니스에는 무슨 일로 왔는지도 들어보고 싶었고, 어떤 여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더 솔직하게는 소설의 재료를 삼을 수 이을 지 모른다는 기대일거다. 설마 그도 같은 이유로 내게 만나자고 했을까?


펍에 도착하니 아직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일렀다. 가볍게 맥주 한 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입구가 바로 보이는 카운터 옆자리였다. 한 시간도 넘게 바닷가에 서 있던 탓이었을까, 목이 타서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한 번에 반 잔이나 비워버렸다. 알콜이 빠르게 혈관을 돌아 살짝 다리에 힘이 빠졌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입구를 바라봤다. 그 사이 해는 더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낮게 흔들리는 조명이 테이블 위에 여러 각도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남은 잔을 다 비웠을을 때, 시계 긴 바늘이 12를 넘어갔다. 6시다. 빈 잔을 양 손으로 꼭 쥐고 입구의 문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그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순간 반가운 마음에 만나자고 했다가 후회할 수도 있고,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급격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딱 30분 만 기다렸다 돌아가자.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6시 15분이 지나고 있었다. 지난 3일 간 보다 더 천천히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조용히 들리는 음악소리가 시곗바늘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세상이 슬로우모션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림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를 적어보았습니다. 100% 허구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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