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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노리고 있다

(1) 두 사람의 살인모의

by 피어라

1.

- 역시 칼로 찌르는 게 제일 낫겠지?

- 무슨 소리야, 사람을 찔러 죽일만한 칼을 어디서 사? 그냥 부엌칼을 가져다 써도 찌르고 나서 그 칼을 어떻게 할 건데? 게다가 찔렀다가 안 뽑히면?

- 그러네, 칼은 좀 그런가. 그럼 약물과다는 어때? 주사기로 찔러 넣던가 물에 탄다거나하면 자연스럽잖아.

- 어떤 약물? 어느 회사 제품으로 할 건데? 전에도 말했지. 제약회사에서 태클 걸 수도 있다니까. 요즘엔 옛날하고 달라. 언제 어디서 소송이 들어올지 모른다고.

- 아, 그럼 같이 등산 갔다가 절벽에서 밀어버려! 발을 헛디뎠다고 하면 되잖아.

- 잘 들어, 아무리 우리나라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이라고 해도 말이야, 떨어져서 두개골이 깨지거나 복합골절로 사망하려면 꽤 높아야 한다고. 애초에 그냥 동네 뒷산으로는 어렵고, 국립공원쯤은 되어야 한단 말이야. 그런 곳엔 등산객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목격자가 하나도 없을 수가 없어. 그렇다고 한 밤중에 몰래 산에 간다?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겠어?

- 그럼, 바다다. 바다밖에 없네. 동해 쪽으로 한적한 바닷가에 절벽 비슷한데서 밀어버리는 거야. 운이 좋으면 해안가에서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고.

- 운에 맡기는 게 말이 되냐? 그러고도 네가 작가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그따위로 할 거면 집어치워!

결국 K는 버럭하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J는 저장버튼도 누르지 않고 한글 화면을 꺼버렸다.

- 야, 저장은 해야지!

K가 다시 소리 지르고는 한숨을 쉬었다.

- 담배 한 대 피우자.

거칠게 담뱃갑을 움켜쥐며 K가 말했다.

- 담..담배 부러지겠어.

- 지금 담배가 부러지는 게 대수야? 제일 중요한 살인 설정부터 막혔는데!


방을 나간 K가 향한 곳은 8월의 땡볕이 쏟아지고 있는 베란다였다. K와 J가 함께 지내는 아파트는 낡은 구축답게 요즘에는 보기 드문 베란다가 있다. 창문 아래로 J가 애지중지 키우는 식물 몇 종류가 햇빛을 받으며 늘어서 있고, 미닫이 문 오른쪽에 작은 원형 테이블과 의자를 두었다.

오전부터 폭염경보가 발효된 날씨지만 K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깥 창문을 열었다. 거칠게 의자를 뒤로 빼고 앉아 보헴을 한 개비 꺼내 불을 붙였다. 가슴이 부풀어 오를 만큼 충분히 빨아들이고 기분 좋게 뱉었다. 같은 동작을 서너 번 반복했을 때, 조심스런 J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면, 민원 들어 와. 지난번에도 관리실 전화 받았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J는 손에 얼음을 띄운 커피를 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잔에서 달그락, 청량하게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도 같았다. K는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여전히 문 앞에 서있는 J를 향해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J는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K는 충분히 J가 불편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즐기던 K가 길게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차가운 카페인 덕분인지 짜증이 사라지고 상쾌함이 솟아났다. 작은 도자기 접시에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서며 K가 말했다.

- 아까 짜증내서 미안하다, 들어가서 다시 해보자. 바닷가 절벽부터 생각해보는 게 어때? 그러니까.......


둘은 다시 온갖 살인과 책략이 난무하는 노트북 속으로 돌아갔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베란다에선 방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모의보다 더 맹렬하게 실외기가 돌기 시작했다.



2.

커서가 반짝이는 노트북 모니터에서 혁이 눈을 떼자마자 조심스레 무진이 물었다.

“어때?”

혁은 잠시 망설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풀기 직전의 아이 같은 눈빛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는 진의 눈빛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혁은 대답 대신 견과류가 들어간 라떼를 천천히 한 모금 더 마셨다. 커피 속의 카페인이 위에서 흡수 된 뒤 혈관을 타고 돌아 뇌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카페인이 자신의 뇌를 자극해서 진이 원하는 멋들어진 답변을 할 수 있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무진이 다시 한 번 물어왔다.

“별로야? 고칠까?”

“일단, J와 K의 인물 설정을 확인해보자. 처음에 우리가 잡은 캐릭터는 둘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이면서 대등한 관계, 약간의 긴장감이 서린 관계였는데, 이건 K가 메인캐릭터처럼 너무 강해보이잖아. J도 너무 소심해보이고. 아직 프롤로그 정도라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설정붕괴 아닐까? 대화도 더 다듬어져야겠고.”

무진의 고개가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매번 그랬다. 디자이너와 광고주도 아닌데 무진은 혁의 의견을 들으면 늘 이견 없이 수용했다. 한 번은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무진의 태도에 대해 혁이 지적한 적도 있었다.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면서 작업하는 쪽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진은 자신에게 아무 결정권이 없다는 듯 오히려 혁을 의아하게 바라봤었다. 자신은 혁이 만든 세계를 옮기는 것뿐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말을 남기고. 그 이후로 혁은 무진의 태도를 트집 잡지 않았다. 혁이 어떻게 생각하든 파트너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점은 공동작업자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장점이다.

“그리고?”

“그리고?”

“응, 그리고 또?”

지치지 않는다는 게 무진의 단점이고. 혁은 무진이 자신의 글이 짓밟히는 걸 보면서 만족해하는 이상 취향을 지닌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무진의 성적취향은 알 길이 없지만 지금 만족시키지 않으면 며칠을 시달려야한다. 아무 말이든 길게 늘려야했다. 혁은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쉬며 다시 A4 뭉치를 집어 들었다. 집게클립으로 대충 집어놓은 종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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